“크레바스는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블랙홀이었다. 실제로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크레바스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 입구가 눈으로 덮여 있어서 여간 주의해서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가 힘들다”
산악인 박정헌 씨가 쓴 ‘끈’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히말라야 등반은 매순간이 사투이지만 특히 무서운 곳이 크레바스 지대라고 한다. 크레바스는 빙하에 균열이 생겨 갈라진 틈새.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허방으로 빠지는데, 그 깊이가 수십, 수백 미터에 달한다니 말 그대로 나락이다.
지난주 한인사회는 우울했다. 가슴 아픈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10일 새벽 남가주에서는 13개월 된 아기를 뒤에 태우고 운전하던 수지 영 김(37)씨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12일 아침 북가주에서는 대학 갓 졸업한 조셉 한(23)씨가 집안에서 경찰의 총에 사망했다.
음주운전 경력이 있던 아기 엄마는 경찰의 정지명령에 놀라 도주하다가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총을 맞았고, 정신적 이상증세가 있던 청년은 가족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수갑이 채워진 채 총격을 당했다. 두 사건 모두 “경찰의 과잉진압”이라고 한인사회는 분노하고 있다.
숨진 여성과 청년은 모두 이민 2세들이다. 언제부터인가 2세들이 어두운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제까지 한인사회는 빛나고 자랑스러운 주인공으로서 2세에 익숙했다. 언론에 2세가 등장할 때면 뭔가 장하고 특출한 케이스들이어서 커뮤니티가 함께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이민 집단으로서 우리가 이렇게 잘 하고 있다는 산증거로 2세들은 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반대편의 그림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2세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로 밀려나는 케이스들이다. 밀려나 음주, 마약, 갱, 혹은 정신질환 등의 크레바스 지대를 비틀대다 어느 순간 발을 헛디뎌 죽음의 크레바스로 추락해버리는 경우들이다. 가장 끔찍한 케이스는 2년 전 4월16일 버지니아 텍에서 총기를 휘두른 조승희 사건이다.
사회학자인 유의영 박사는 이번 경찰 총격사망 사건에 특히 가슴 아파하고 있다. 흔들리는 2세들을 붙잡아 줄 구심점이 한인사회에 없다고 그는 개탄했다.
“1세들이 잘못해서 이런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 겁니다. 2세들이 소속감을 가지고 마음 붙일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지요”
1세들의 정신적 안식처인 교회가 2세들을 껴안지 못한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던 2세들이 성년이 되며 뿔뿔이 흩어지고, 밖으로 나가 방황하다 이런 일이 터지는 것”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아울러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의 ‘1등주의’이다. 이민사회란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지금보다는 미래, 현실보다는 꿈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 1등으로 달리는 것을 너무 당연시하는 분위기이다. 반면 그렇지 못하고 뒤처지는 것에 대한 포용력은 대단히 부족하다.
전교 수석과 SAT 만점과 명문대 합격…무대 위의 주인공들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강렬할수록 무대 뒤편으로 밀려난 자들이 감당해야 할 어둠은 깊은 법이다.
크레바스는 한번 빠지면 그대로 죽음이다. 살아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유일한 희망은 외부와 연결되는 끈이다.
앞의 산악인 박정헌 씨는 2005년 1월 촐라체 북벽 등반에 성공한 후 하산하다 조난을 당했다. 자일로 서로의 몸을 묶고 함께 등반했던 후배가 크레바스에 빠진 것이었다. 추락 직후의 경험을 후배 최강식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의식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찰나, 몸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일이 위쪽으로부터 당겨지는 순간, ‘살았구나’ 하는 한 줄기 희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두 사람을 묶었던 끈, 자일이 있어서 최씨는 목숨을 건졌다.
‘1등’에 대한 박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꼴등’에 대한 격려다. 좀 부족하고, 좀 처지고, 좀 비틀대는, 그래서 기대에 차지 않는 자녀나 형제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따뜻했으면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관계의 끈을 탄탄히 했으면 한다. ‘끈’ - 관계가 사람을 살린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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