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국 스포츠의 영광 뒤에는 ‘위대한 여전사’들이 있다고들 말한다. 한국 스포츠가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적을 살펴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올림픽에서 따낸 메달수도 그렇고 각종 국제대회에서 여자 선수들이 거둔 성적을 보면 지금 한국사회 각 분야를 휩쓸고 ‘여풍’이 가장 먼저 불기 시작한 분야가 스포츠임을 확인하게 된다.
피겨의 김연아가 지난 주말 LA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경쟁자들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성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데 대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억척스레 견디며 용기와 끈기를 보여줬던 우리 어머니들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풀이들을 한다. 어쨌든 김연아의 우승은 한국 스포츠의 거센 여풍을 이어간 기분 좋은 쾌거였다.
그런데 김연아의 우승 후 한국사회를 광풍처럼 휩쓸고 있는 ‘김연아 신드롬’에는 솔직히 우려가 고개를 든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분명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스포츠일 뿐이다. 특히 피겨 스케이팅은 태극마크를 달고 벌이는 국가별 대항전도 아니고 개인 기량을 겨루는 종목이다. 그런데도 피겨 스케이팅에까지 한일 두 나라 간의 감정이 언급되고 김연아의 우승이 마치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상징해 주기라도 하는 듯 온 나라가 호들갑을 떠는 것은 보기에 편치 않다.
김연아가 최고점수로 숏프로그램을 마무리하고 프리스타일 경기를 앞두고 있던 지난 토요일 오후 프리웨이에서 우연히 한 한인 라디오방송 DJ의 멘트를 들었다. 진행자는 전날 숏프로그램을 다녀왔는지 “김연아 선수는 정말 최고였다”고 운을 뗀 뒤 “그런데 제 앞에 앉아 있던 한국 아주머니는 일본 선수가 연기할 때 박수를 치던데 아주머니 어깨를 붙잡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응원하느냐’고 묻고 싶었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런 배타적 태도까지 나라사랑으로 봐줘야 할지 어쩔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국의 방송사들이 김연아 우승을 보도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함은 우려로 바뀌었다. ‘도배질’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 스포츠 전문 채널도 아닌 공중파 방송의 프라임 시간대 뉴스에서 김연아 관련 보도를 10여 꼭지 잇달아 내보냈다. 국가적 중대사 혹은 위기 때나 있을 법한 편성이다.
아무리 한국이 불모지였던 피겨에서 따낸 금메달이고 김연아라는 걸출한 국민적 스타가 거둔 성과라 해도 이런 보도 양태는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다. 이 때문에 ‘정치적 의도’에 대한 추측도 나오지만 그렇지 않다면 전형적인 쏠림 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드롬’이라는 쉽지 않은 영어 단어가 한국사회에서는 일상어가 된지 오래다. 언론이 신드롬이라고 부르면서 어떤 사회현상을 진단하면 그것은 곧 진짜 신드롬이 되어 버린다. 황우석 신드롬이 그랬고 김수환 신드롬 역시 그러했다. 김연아에 대한 국민들의 열광에 신드롬이란 이름을 붙여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김연아 신드롬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신드롬이 횡행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보기 힘들다. 많은 경우 거기에는 집단주의의 그늘이 드리워 있기 때문이다. 김연아 신드롬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2년 전 발생한 버지니아텍 조승희 사건이었다. 한 개인이 저지른 참사에 한국 사람들은 괜히 죄스러워하고 주미대사와 한인사회는 사과의 뜻을 표명하기까지 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런 반응에 대해 “한국인은 한 명이 큰일을 해내면 국민 모두가 자기 일처럼 으쓱해 하고, 반면 누구 하나가 큰 사고를 치면 모두가 수치심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과잉반응의 저변에 깔려 있는 열등감을 꼬집은 것이다. 국제무대서 조금 알려졌다 싶으면 붙이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이라는 상투어 속에도 이런 의식의 흔적이 드러난다.
김연아 우승 후 고려대가 재빨리 일간지 1면에 낸 광고는 이런 오버의 극치다. 이 학교는 ‘고려대가 세계적인 리더 김연아를 낳았다’는 문구의 광고를 내보냈다. 김연아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한달 전. 그나마 그동안 캐나다와 미국에 머물렀으니 정작 이 학교 문턱을 몇 번이나 밟았을까 싶은데 불과 한달 만에 ‘세계적 리더’를 낳았으니 그 교육 능력이 놀랍기만 하다.
과장과 과잉은 볼썽 사납다. 성숙의 가장 두드러진 징표는 절제다. 이제는 한국사회가 조금 더 쿨 해졌으면 한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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