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들마다 볼이 터져라 머금고 있는 꽃잎을 터트릴 날이 머잖은 듯하다. 봄은 그렇게 꽃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이라 여겼었는데 정작으로 봄은 숲의 나무들로 먼저 오곤 했다.
내 어릴 적 봄은 빨랫줄로 왔다. 어머니는 겨우내 묵었던 이부자리를 걷어내 아직 얼음기가 가시지 않은 냇가로 가져가셨다. 놋대야에 담겨서 폴폴 김이 나던 홑이불들은 차가운 냇물에 개운하게 빨아져 돌아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물내 나는 빨래에서 톰방톰방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봄을 느꼈다. 마당 가득 넓은 빨래가 널리는 그 즈음이면 앞산은 기슭마다 초록을 품어가고 있었다.
몇 해 전 어머니가 다녀가셨다. 새로 시작한 사업 때문에 도우러 오셨던 어머니는 산책을 좋아 하셨다. 깜깜해져야 돌아오는 딸에게 저녁 산책길에 보셨던 이런저런 풍경을 이야기하시곤 했다.
“이 골목의 제일 끝에 있는 집 있잖냐, 그 집은 정원이 참 좋더라. 넌 언제 그렇게 좋은 정원을 갖고 사냐. 원 날마다 그렇게 일만 하고서야….”
“ 미국은 땅이 좋아선지 웬 나무들이 그렇게 키가 크냐?”
“ 막내 다니는 학교 앞에 대나무 많은 집 있잖냐. 그 집에는 수국나무가 있더라. 미국은 수국도 나무에서 피더라.”
하루 종일 심심하게 지내시던 어머니는 늦은 저녁을 먹는 큰딸 앞에 앉으셔서 반찬을 밀어놓아 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친정아버님의 칠순잔치 때문에 봄꽃들을 구경 못하시고 가시게 된 전날 밤, 어머니 곁에 누워 아쉬운 이별전야를 보내는데 문득 어머니는 산책길에 어느 집에서 보셨던 꽃을 이야기하신다.
“내 생전 처음 보는 꽃이여. 눈도 채 안 녹은 데가 있는 이 철에 노랑꽃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게 참 신기하고도 이쁘더라. 니가 시간이 있으면 꽃집 가서 그걸 좀 사왔으면 좋았을 건디. 한국에는 그런 꽃이 없어….’
며칠을 두고 보며 그 꽃이 신기해 구경하셨는데 말씀을 못하시다가 막상 떠나시려니 아쉬우셨던 것 같다.
경험 없이 시작한 사업에 온정신이 빼앗겨 있을 때라서 반년이나 우리집 끼니와 집안일을 맡아주시고 떠나시는 어머니께 변변한 선물 하나 준비 못해 가슴이 뻐근한 밤이었다.
“엄마 어떤 집이야. 한번 가보자.”
집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한 뿌리만 얻어볼 양이었는데 집안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다행히 그 꽃은 그 집 앞 가로수 나무 밑에 둘레둘레 피어 있었다. 아주 정확히는 그 집 소유가 아닌 땅에 피어 있었던 것이다. 아주 손톱만한 노란 꽃이었다. 나뭇가지로 흙을 꽃과 함께 한 컵만치 파내어 들고 돌아서는데 가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전까지 올라왔다.
“아이고 내가 생전 해보지 않은 도둑질을 다 했다. 이건 해마다 번치는 꽃이니께 괜찮을껴. 돈 주고 사다 심은 꽃은 아닌 거 같어. 사실 꽃은 하나님이 다 만든 것인디 뭐. 큰 죄는 아니겄지? 내가 영어만 할 줄 알았어도 너한티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을 건디.”
아무리 가로수 밑이라지만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어 어머니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대꾸도 못한채 발걸음만 재촉했다. 집에 돌아와 불빛 밑에 세어보니 꽃은 꼭 다섯 송이였다. 손톱만한 꽃을 흔들면 작은 종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샌드위치백에 꽃컵을 넣으시고 구멍을 송송 내어 숨을 쉬게 해주시는 등 온통 꽃 생각뿐으로 보이셨다. 어머니는 공항에서도 딸과의 이별보다는 핸드캐리어 가방 안에 가지고 가시는 꽃이 염려되어 자꾸 가방 지퍼를 여셨다 닫으셨다 하셨다.
“숨을 쉬어야 살틴디. 죽지 마라. 나랑 같이 가서 살자.”
덕분에 염려되고 자신없었던 공항의 이별에서 눈물 콧물을 덜 흘려도 되었다.
어머니는 뜰에 꽃을 심으시고 애지중지 키우셨고 이듬해 그 꽃줄기는 땅속으로 벋어 열 송이도 넘는 꽃을 피워냈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제일 먼저 꽃을 피워내면 딸 보듯 꽃을 보신다고 하셨다. 추위에 아주 강한 그 꽃의 이름을 지금도 나는 모른다. 해 저물어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으로 돌아올 때면 일부러 그 집 앞으로 돌아서 오곤 하던 기억이 있다. 고생만 하시고 가신 어머니가 가슴에 얹혀 옹기종기 핀 그 꽃들을 쳐다보면 눈물이 뚝 떨어지곤 했다. 그때부터 매 해 이맘때가 되면 나의 봄은 그 나무밑둥같은 어머니를 향한 노오란 그리움으로 어룽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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