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합중국은 타협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미국이 독립을 쟁취한 후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작은 주와 큰 주, 북부와 남부 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큰 주는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배분을 원했고 작은 주는 크기에 관계없이 똑같은 대표권을 주장했다. 의회를 상하원으로 나눠 하원은 인구 비례로, 상원은 주 숫자대로 대표를 뽑는 현 제도는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한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다.
일부 노예제 폐지론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를 합중국의 일원으로 묶어 두기 위해 이를 인정하는 대신 연방 헌법이 제정된 후 20년이 지난 1808년부터는 노예무역을 폐지할 수 있게 한 조항도 이렇게 해서 마련됐다. 이런 타협이 없이는 미국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버금가는 중요한 타협이 1790년 6월 20일 토마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만찬에서 이뤄졌다. 당시 주 정부는 2,500만 달러라는 독립 전쟁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부채 상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미국이 실질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정부 운영 자체가 어려운 판이었다. 강력한 중앙 정부를 지지하는 해밀턴은 이를 모두 연방 정부가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비대한 중앙 정부를 혐오한 제퍼슨은 이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이에 못지않게 시급한 또 하나의 문제는 미국의 수도를 정하는 일이었다. 당시 수도는 뉴욕이었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 항구적인 수도를 어디론가 정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단지 그 위치를 뉴욕이나 그 북쪽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버지니아 등 남부 쪽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뉴욕 출신인 해밀턴은 당연히 뉴욕 이북을 밀었고 버지니아 출신인 제퍼슨은 남부를 고집했다.
이 둘 사이의 저녁 모임에서 결정된 것이 수도를 버지니아 인근으로 하는 대신 연방 정부의 채무 인수를 남부 주들이 지지한다는 타협안이었다. 그 결과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접경에 연방 정부의 새 수도가 생겨나게 되고 전쟁 채권의 가치가 보장되면서 미국의 신용도 살아나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자급자족형 농업 사회를 이상형으로 꿈꾸던 제퍼슨과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부국강병을 주장한 해밀턴과의 싸움은 결국 해밀턴의 승리로 끝났다. 연방 국채 시장의 등장은 금융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는 미국 상공업의 발전을 도왔다. 그럼에도 해밀턴 이후에도 국가 채무에 대한 반감은 미국인의 정서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1929년 주가 폭락과 함께 시작된 대공황 때도 국채를 늘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 때문에 균형 예산을 만드느라 과감한 경기 부양책을 내지 못했다.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도 시장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당국자들의 행보를 보면 당시와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할 수 있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지난 주 1조 달러를 들여 연방 채권과 정부 보증 모기지 채권을 사들이겠다고 밝힌 데 이어 팀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23일 역시 1조 달러 규모의 부실 채권 인수 작업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버냉키의 채권 매입이 달러를 풀어 유동성 공급을 늘리고 모기지 금리를 내리겠다는 계산이라면 가이트너 발표는 신용 경색의 근본 원인인 모기지 부실 채권을 경매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금융 위기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겠다는 발상이다.
지금까지 이들의 작전은 먹혀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0년 고정 모기지 금리는 5%이하로 하락하고 있으며 23일 다우존스 산업 지수는 500 포인트 가까이 급등하며 모처럼 만에 투자가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연방 정부의 부실 채권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나 FRB의 ‘돈을 찍어’ 채권을 사는 행위는 양쪽으로 날 선 검이다. 신용 경색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연방 정부의 신인도를 낮추고 달러화의 추락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지금은 먼 훗날보다 코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 이런 조치를 취했겠지만 위험한 도박이다. 미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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