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 10회 한국 클로저 임창용(왼쪽)이 일본 타자 스즈키 이치로에 결승타를 허용하고 있다.
세계야구 역사상 이런 피 말리는 승부가 있었을까. 선수들과 팬들이 혼연일체로 땀과 피와 눈물로 싸운 혈투였다. 다저스테디엄을 가득 메운 5만4,856명(WBC 신기록)은 그 누구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23일 LA 다저스테디엄에서 펼쳐진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결승전에서 한국은 연장 10회까지 가는 4시간의 혈전 끝에 5-3으로 패해 분루를 삼켰다. 이로써 일본은 2회째를 맞은 WBC에서 2연패에 성공했고 에이스 다이스케 마쓰자카(3승, 방어율 2.45)가 MVP로 선정돼 대회 MVP도 2연패했다.
경기는 일본의 페이스로 시작됐다. 한국선발 봉중근은 초반 제구력이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일본 타자들은 그의 유인구를 잇달아 속지 않고 파울로 커트해 내 어려운 경기를 했다. 1, 2회 모두 안타와 포볼로 두 명씩의 주자를 내보냈으나 실점없이 넘긴 봉중근은 3회 선두 나카지마에 숏 깊숙한 내야안타를 내준 뒤 다음타자 아오키의 직선타구를 2루수 고영민이 놓치는 에러로 곤경에 처한 뒤 1사 1, 3루에서 오가사와라에 우전적시타를 맞고 선취점을 내줬다. 계속해서 우치가와에 우전안타를 맞고 1사 만루의 절대위기에 몰린 봉중근은 그러나 구리하라를 숏 병살타로 유도, 초반 최대 고비를 넘겼다.
이 병살타가 기폭제가 됐을까. 봉중근은 4회초 이날 처음으로 일본타선을 삼자범퇴로 처리했고 이때까지 일본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에 눌려 아무도 1루를 밟지 못하던 한국의 타선은 4회말 2사후 김현수가 깨끗한 중전안타를 터뜨리며 노히트의 수모에서 벗어났다. 이어 김태균이 풀카운트에서 좌중간으로 빨랫줄처럼 뻗어나간 깊숙한 타구를 터뜨렸으나 펜스앞에서 좌익수에 잡히고 말았다.
바로 다음 이닝에서 한국은 봉중근이 2번 나카지마에 포볼, 3번 아오키에 우전안타를 맞아 무사 1, 3루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여기서 한국의 구세주로 나선 것은 ‘마당쇠’ 정현욱이었다, 봉중근을 구원한 정현욱은 다음타자 조지마 겐지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오가사와라도 삼진으로 잡았고 이 때 2루를 훔치려던 1루주자를 캐처 박경완이 정확한 송구로 잡아내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이와쿠마에 철저히 눌려 잠자던 한국타선을 깨운 것은 역시 유일한 빅리거 추신수였다. 5회말 선두타자로 나선 추신수는 이와쿠마의 3두 몸쪽 직구를 통렬하게 밀어쳐 좌중간 펜스를 넘기는 동점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베네수엘라와의 4강전에 이어 또 다시 결정적인 상황에서 한 방을 터뜨린 추신수는 메이저리그 거포로서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세를 집요했다. 7회초 선두 가타오카가 좌전안타를 치고나가 2루를 훔친 뒤 이치로가 3루쪽 기습번트안타에 이어 나카지마의 좌전안타 때 홈인, 다시 2-1로 앞섰다. 이어 8회에는 1사후 우치카와의 안타에 이어 이나바가 구원투수 류현진으로부터 1루 베이스를 맞고 튀는 2루타로 2, 3루를 만든 뒤 이와무라의 레프트 희생플라이로 또 한 점을 도망갔다.
패색이 짙어가던 한국은 8회 선두 이범호가 라이트펜스를 직접 때리는 2루타를 치고 나가며 다시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이범호는 고영민의 내야땅볼로 3루에 간 뒤 대타 이대호의 센터 희생플라이때 홈을 밟았고 한국은 다시 한 점차(3-2)로 따라갔다. 일본은 9회초 선두 이치로가 한국의 임창용으로부터 2루타를 치고 나갔으나 후속타 불발로 2루를 떠나지 못한 채 이닝을 마쳤고 한국은 운명의 마지막 9회말 공격을 1점차로 뒤진채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은 9회가 되자 일본 최고의 투수라는 다르빗시 유를 클로저로 내세웠다. 한국은 대타 정근우가 5구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으나 김현수가 스트레이트 포볼을 얻어내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이어 김태균도 긴장한 다르빗시로부터 포볼을 얻어내 1, 2루의 찬스를 만들었으나 여기서 믿었던 추신수가 삼진으로 돌아서며 희망의 불도 꺼지는 듯 했다.
하지만 한국의 저력은 무서웠다. 이범호가 있었다. 이범호는 천금의 좌전 적시타를 터뜨려 핀치러너로 나간 이종욱을 홈에 불러들여 3-3 동점을 만들며 승부를 연장으로 넘겼다.
그러나 승부의 저울추는 10회초 다시 일본쪽으로 기울었다. 선두 우치카와의 우전안타에 이어 이나바의 보내기번트, 이와무라의 좌전안타로 2사 2, 3루에서 임창용은 이치로에게 통한의 중전 적시타를 맞고 2점을 내줬다. 극복하기엔 너무 큰 차이였다. 한국은 10회말 선두 강민호가 포볼을 골라나가며 마지막 희망을 불태웠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대타 최정이 삼진, 이용규가 레프트플라이로 물러났고 마지막 타자 정근우도 삼진으로 돌아서며 일본이 환호하는 장면을 가슴에 눈물을 흘리며 지켜봐야 했다.
<김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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