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 /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중에서>
시 속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입가에 웃음이 절로 번진다.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는 파, 막무가내로 피어나는 밤꽃 … 바쁘고 생동감 넘치고 신바람이 난다.
지난 한주 한인사회의 분위기가 꼭 이 시를 닮았다. 경기장으로 달려간 팬들은 팔 아프도록 플래스틱 막대를 딱-딱 두드리고/ 대형 TV 갖춘 식당·주점에는 손님들이 쑥쑥 밀려들어 매상이 팍팍 오르고/ 불경기로 시름 깊던 직장, 가정에서는 웃음꽃이 또 막무가내로 피었다.
불안한 앞날 걱정에 잔뜩 얼어 불었던 우리 가슴 속에 한바탕 훈풍이 불어왔다.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이 몰고 온 바람이다. 이어지는 승전보로 웃음꽃이 만발하니 무겁게 가라앉았던 한인사회 분위기가 갑자기 느슨하게 헐거워지면서 휘발성으로 날아오른 느낌이다. 신바람의 힘이다.
90년대 후반 ‘신바람 건강법’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연세대학교의 황수관 박사가 개그맨 못지않은 입담으로 펼쳐낸 이 건강법은 다른 말로 하면 웃음 건강법이다. 불안 초조 짜증은 교감신경을 과민하게 만들어 심장을 상하게 하고 여러 장기 활동에 해를 끼치니 웃으며 살자는 내용이다. ‘하하하’ 웃으면 긴장이 풀리고 혈액순환이 원활해지며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진다며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요즘 정치 사회 경제 어디를 둘러봐도 신나는 일이 없는데 이것이 국민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고혈압 암 등 성인병 환자를 줄이려면 먼저 신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국이 IMF 사태를 맞았던 그 즈음과 지금의 분위기는 많이 흡사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신나는 일 없는 우리 삶의 무대에 한국 야구가 선물처럼 신바람을 몰고 왔다.
신바람이란 영혼 깊은 데서부터 솟아나는 신령한 기운, 존재의 춤 같은 것. 사람마다 지능지수, 감성지수가 다르듯 신바람 나는 정도도 다른 것 같다. 무슨 일에나 쉽게 신나 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좀처럼 신이 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신바람 지수’라고 이름 붙인다면 대개 낙천적이고 개방적인 사람들이 지수가 높다. 그런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신바람을 자가발전하며 신나게 살수가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해 1,000여 통의 편지·소포를 배달하고 다음날 배달 물량을 챙기고 나면 저녁 7시가 넘어 퇴근 - 한국 집배원들의 하루 일과다. 일은 고되고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빛이 나는 직업도 아니다. 직업이 성에 차지 않아 불평 속에 마지못해 일하는 집배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전에 사는 최명신(42)씨는 다르다. 집배원 17년 경력의 그는 편지만 배달하는 게 아니라 웃음도 배달한다. ‘웃음 배달’을 잘 하기 위해 웃음 치료사와 마술 치료사 자격증까지 땄다. 편지를 들고 이 집 저 집을 들여다보니 의외로 혼자 사는 노인, 보육원 어린이 등 외로운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후 그는 집집을 다니며 편지로 웃음으로 신바람을 나눠주고 있다. 며칠 전 ‘올해의 고객감동 집배원’으로 뽑혀 상을 받은 주인공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서울의 한 지하철 기관사도 ‘신바람 지수’가 높은 사람이다. ‘7호선의 DJ’로 불리는 유진옥씨(37)다. 3년 전 늦깎이로 기관사가 된 그는 스트레스 심한 출퇴근길 승객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정차역 안내 방송 시 곁들이는 경쾌한 덕담이다. 이런 말이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이 차에 모두 내려놓으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승객들의 기분이 얼마나 환해졌겠는가.
야구가 몰아준 신바람은 며칠 후면 끝이다. 외부에서 오는 신바람은 시한부다. 스스로 자가발전하는 신바람만이 생명력이 있다.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사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삶 그 자체에서 신바람을 느끼는 능력인 것 같다. 현실에 감사하는 빈 마음이 먼저 있어야 가능하겠다. 그래서 ‘신바람 지수’를 높이면 비닐봉지 안에서 파가 쑥쑥 자라듯,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기쁨이 막무가내로 피어날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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