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경제 때문에 시름 가득하던 한인들의 얼굴에 모처럼 활기가 돌고 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출전하고 있는 한국팀이 선사한 엔돌핀 덕이다. 한국팀이 WBC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한인사회는 신바람에 휩싸여 있다. 오후에 샌디에고로 떠나 다음날 새벽 3시에 LA로 돌아온 고된 응원길 이었는데도 별로 피곤한 표정들을 찾아볼 수 없다. 역시 승리가 안겨주는 짜릿함은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스포츠에는 우리를 열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스포츠가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거나 사회적인 고질병들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몰입한다. 경쟁 자체가 주는 긴장감이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애국심이라는 기름이 부어지면 엄청난 폭발력이 생긴다. “스포츠는 대리적이지만 실제적인 기고만장함을 성취시켜 준다”는 한 사회학자의 지적은 한국팀이 이기면 왜 내가 이긴 것인 양 흥분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한국팀의 승리는 나의 개인적인 우월성이 되고 자부심이 된다.
이번 WBC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야구가 돌풍을 일으키며 우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 야구는 ‘스몰볼’이라는 특징으로 압축된다. 반면 메이저리그와 중남미 야구는 ‘빅볼’로 분류된다.
스몰볼은 글자 그대로 정교한 야구를 의미한다. 기본을 중시하고 작전과 팀플레이를 앞세운다. 또 타석에서는 끈질긴 면모를 보인다. 확률이 높지 않은 큰 것 한 방보다는 리스크 관리를 통해 착실하게 득점을 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감독의 판단과 결정이 경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몰볼과 빅볼은 파워의 차이보다는 스타일과 철학의 차이를 의미하는 구분이다. 그런데도 어감 때문인지 은연중에 스몰볼은 빅볼에 비해 뒤처지는 것으로 취급 받아 왔다. 두 지역 야구가 정면대결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인식이 형성된 이유였다. 그러나 막상 올림픽과 WBC를 통해 두 야구가 맞붙게 되자 스몰볼이 빅볼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한국 야구 금메달과 일본의 지난 WBC 우승이 증거이다.
한국이 멕시코전에서 홈런 3방을 날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빅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빈공에 시달린다고 스몰볼이 아니듯 말이다. 한국 야구의 기본적 바탕은 여전히 스몰볼이다. 다만 한국야구가 일본과 다른 점은 ESPN 야구해설자인 오럴 허샤이저가 지적했듯 “보다 창의력이 풍부한 스몰볼”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한국팀 중심타선에는 수호지 등장인물들을 연상시키는 거구들이 버티고 있는데 이들의 존재감을 더해 주는 것이 스몰볼이다. 파워는 정교한 팀플레이가 뒷받침 될 때 더 생산적이 된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거포들이 즐비함에도 팀 성적이 신통치 않은 것은 정교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멕시코전은 한국식 스몰볼의 진가를 그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김인식 감독은 그런대로 잘 던지던 선발 류현진이 3회 위기에 몰리자 경기 초반임에도 주저 없이 교체했다. 또 경기 중반 다시 위기에 몰리자 더블플레이 유도를 위해 2루수를 바꿨다. 수비목적으로 교체돼 들어간 2루수 고영민은 다음 공격에서 홈런을 날렸다. 한국팀은 이날 더블 스틸과 번트, 그리고 상대 수비의 허를 찌르는 기습 안타 등 창의력 넘치는 스몰볼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야구는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가면서 점수를 올리는 스포츠다. 하지만 큰 것 한방으로 단숨에 역전도 가능하다. 여기에 야구의 묘미가 있다. 그래서 흔히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단기전인 WBC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한국팀의 ‘창의력 넘치는 스몰볼’을 보면서 지금 경제적 위기를 헤쳐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어프로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위기 앞에서는 실수가 허용될 여지가 별로 없다. 투자의 기본에 충실하고 현명한 리스크 관리를 통해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미련 없이 선수를 교체하듯, 아니다 싶으면 빨리 판단해 궤도를 수정하는 기민성과 임기응변 또한 요구된다. 한 방을 노려대는 지나치게 큰 스윙과, 부진한 투수를 고집스레 마운드에 올리는 빅볼 어프로치는 호황기에나 허용될 법한 사치이다.
한국팀은 탄탄한 기본에 파워, 그리고 창의성까지 가미한 야구를 보여주면서 스몰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팀의 플레이에는 단순한 스포츠의 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이들이 더욱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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