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버네 쇼비뇽 등 대기만성형 와인
수확 연도따라 숙성 기간도 달라져
사람마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젊은 시기에 확 타올랐다가 급속도로 식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이는 오랜 시간 서서히 성장해 뒤늦게 능력을 발휘하는 대기만성형도 있다. 사람마다 성장과 하락의 곡선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어떤 와인은 그 성장곡선이 가파르지만 금세 하강하는 와인도 있듯이, 어떤 와인은 아주 서서히 성장해 수십 년이 지나야 비로소 제 맛을 내는 와인도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 매니저가 용병술을 쓸 때, ‘적재적소‘와 ‘적당한 시기’를 고민하듯, 와인을 오픈하는 시기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와인을 사려고 매장에 가서는 다짜고짜 “몇 년산 주세요. 왜 몇 년산 없어요?”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심지어 “어? 이건 같은 와인인데 가격이 다르네요”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빈티지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걸 정확하게 이해해서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걸 반증하는 사례다.
빈티지는 와인이 병입된 연도가 아닌 포도가 수확된 연도를 말하는데, 와인이 포도로 만든 과실주인 이상, 그 해의 작황은 와인의 품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서 바로 또는 1~2년 안에 마시는 10만원 이하의 일반적인 와인들은 사실상 빈티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 특정 해의 특정 포도로 생산된 와인은 충분한 숙성을 필요로 해, 이럴 경우 빈티지는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카버네 쇼비뇽 같은 튼튼한 골격을 갖춘 포도품종으로 만들어진 와인은 이른바 ‘좋은 해’라 불리는 기후조건을 만나면 오랜 숙성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와인들은 바로 따서 마시면 시고 떫은 거친 맛을 내지만, 오래도록 숙성을 시키면 깊고 풍부한 향과 실크처럼 부드러운 맛으로 변화된다. 우리가 빈티지 와인을 얘기할 때는 바로 이런 대기만성형 와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봄 국내에서 열린 와인 경매행사에서 560만원이라는 기록적인 가격으로 팔린 샤또 라뚜르 1961년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와인이다. 이 해의 포도 작황은 와인 애호가들이 전설적인 빈티지라고 부를 만큼 좋았던 해였다. 물론 이 해에 생산된 다른 와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셔졌거나 버려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와인들은 샤또 라뚜르와 같은 오랜 숙성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대기만성형 와인들도 마시기에 최적인 해를 넘어서면 맛이 변하거나 자칫 부패할 수도 있다. 즉 와인은 그저 오래될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각 와인에 따라 마시는 가장 ‘적당한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고민이 생긴다. 괜찮은 와인 한 병을 선물 받았는데, 지금 바로 오픈해서 마셔도 되는 것인지, 혹시 좀 더 숙성시켜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마셨어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티지 차트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매년 ‘와인 스펙테이터’ 같은 세계적인 와인 잡지나 와인 전문기관에서는 빈티지 차트라는 걸 만들어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각 지역과 생산 연도, 품종별로 점수를 매겨 더 보관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마셔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나라마다, 발표하는 기관마다 모두 빈티지 차트가 같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 맞는 것을 찾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빈티지 차트를 절대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빈티지 자체가 포도의 출하 상태에 대한 지역별 평가이지 특정 와인에 대한 개별적 평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와인 생산자와 능력과 와인의 저장 상태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공 비즈니스를 위한 와인 가이드’(김기재 지음·넥서스 Book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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