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은 산이 높고 산골이 깊었다.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저물어 갔다. 그래도 영철에게는 눈을 껌뻑 할 만큼 새로운 것이다. 산을 휘돌아가는 바람소리도, 우거진 숲 사이로 여우의 꼬리를 볼 수 있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부엉이 울음소리도 반갑다. 하늘 높이 솟아 연처럼 이곳저곳을 나는 솔개를 영철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명구가 뒤에서 어깨를 쳤다.
“야, 철아, 저 도둑놈 같은 솔개가 뭐 그리도 좋냐?” 명구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영철은 솔개가 나는 방향에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나도 저렇게 높이 날 수만 있다면”하고 스며드는 말끝을 흐렸다.
명구의 아버지가 영철을 장터에서 데리고 온지 벌써 몇 해가 되었다. 만 7살이 되는 영철은 고궁과 큰 관공서가 많은 도시에서 태어나 젊은 부모 밑에서 자랐단다. 피난길에 오산인가에서 폭격을 맞고 부모님과 헤어져 이때 만난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장터에까지 오게 됐고 명구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명구는 한살이 더 위이지만 그를 친동생처럼 돌봤다. 십리가 넘는 학교를 영철이 손을 잡고 때로는 업혀 학교를 갔다. 영철은 한 번도 부모를 그립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보리밥에 깻잎을 싸먹는 것을 그렇게도 좋아 했다. 군불을 때 뜨끈뜨끈한, 장판 대신 신문지로 도배한 아랫목에서 코를 골며 잤다.
새벽마다 명구는 비둘기 깃털로 영철의 눈을 간지럼 태워 잠을 깨우고 씨름을 건다. 힘센 팔과 다리로 영철이의 목을 감고 쓰러지지만 늘상 막판에는 슬쩍 져준다. 학교를 다녀와선 책가방을 던지고 산토끼를 잡으려, 새알을 찾으러 숲속을 헤맸다. 이렇게 즐거운 나날을 지내는 동안 영철은 잃어버린 부모를 생각할 날이 없었다. 산골생활에 정이 들어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한창인데 이날은 여름처럼 큰 줄기의 장맛비가 쏟아져 내렸다. 작은 개천이 통나무 다리에까지 물이 불어났다. 영철이가 앞서 건너고 명구가 영철이의 책보까지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급물살은 통나무를 밀쳤다. 그리고 둘은 거센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명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영철이의 까만 머리가 보일랑 말랑 개천을 따라 흘러갔다. 명구는 있는 힘을 다해 물결을 차고 뭍으로 나와서 개천가를 달렸다.
천만다행으로 영철이가 까만 바위에 걸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명구는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물결이 명구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명구는 빗속에서 소리쳤다. “철아, 살아 있어, 내가 간다.” 명구는 정신을 잃은 영철을 어깨 위에 올렸다. 철이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명구의 귀에 들려왔다. “철아, 살아야 해!” 명구은 소리쳤다.
다음날 해가 반짝이며 산 위로 오를 때, 읍장과 할아버지와 멋진 신사복 차림의 도시 사람이 철이를 찾아왔다. 명구는 짐작으로 영철이를 찾아온 사람임을 잽싸게 눈치 채고 사립문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영철을 불러냈다. 그 신사는 영철을 안아 올렸다. 영철은 눈을 돌려 사립문 쪽을 봤다. 명구는 그의 심장이 꺼져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신사와 영철 일행은 흙담을 돌아 나갈 찰라 명구는 사립문을 박차고 나갔다. 영철의 손을 잡고 그의 발에서 다 헤어진 운동화를 벗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전에 사다준 아끼고 아꼈던 흰 고무신을 그에게 신겼다. 그리고 헌 운동화를 가슴에 안고 돌담 뒤에 서서 일행이 멀리 사라져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간 후, 영철은 월남 청룡부대 의무 중대장으로 격전이 일고 있는 케산 지구에 파병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를 흰 고무신 의사라고 불렀다. 중대가 월맹 여단의 포위 속에 전투가 시작되자, 중대 의무소는 부상자로 넘쳤다. 그의 흰 고무신은 부상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눈 붙일 새 없이 꼬박 응급수술을 하고 여단 및 미군 매쉬 병원으로 수송할 때까지 부상자들을 살게 해야 한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했다.
소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김 소위는 30여 군데나 파편과 총상으로 몸 전체가 파편을 맞고 들것에 실려 왔다. 그는 그래도 정신이 맑았다. 수혈과 링거의 줄들이 팔을 묶고 있는데도 그는 의사에게 거수경례를 하려 했다. 영철은 그가 너무 가련해 보였다. 영철은 가장 멋진 거수경례로 답을 하고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잠깐 얹고 위로를 했다. 그리고 충분한 진통제와 영양주사를 놓아 주었다. 김 소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깔다가 눈을 크게 떴다. “군의관님, 혹 서산에 사신 적 있지요?” 영철은 김 소위의 영어로 쓴 꼬리표를 다시 읽었다. 명구 김 소위 라고 씌어 있었다. 영철이 눈에서도 눈물이 괴어왔다. 한 방울 그의 눈물이 흰 고무신 위로 떨어져 빨간 피를 희석하고 있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