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의 역사, 유래부터 다뤄보려고 하였으나 언제부터, 왜 그 땅이 우리 땅이었느냐는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있어 1712년 5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게 되는 그 전후 사정부터 다뤄보기로 한다.
우선 간도가 우리 영토가 아니었다면 왜 청국은 간도 땅을 받는 조건으로 무순탄광 채굴권과 철로사업을 일본에게 주는 협약을 맺었겠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스스로의 역사인식에 오류는 없는지 여부를 성찰해 보아야할 것이다. 즉 자신의 역사의식 속에 반도사관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으므로 해서 반도 밖 대륙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그릇되었다, 황당하다, 석연치 않다는 등의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이에 대한 자기성찰이 선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러지 않고서는 “간도는 아시아대륙의 동쪽인 백두산 일대와 흑룡강 유역 및 내몽고를 거쳐 발해만에 이르는 지역 일대가 4, 5천년 동안 우리민족의 생활무대였던 곳입니다”라든가 “고조선(단군조선) 말기에 송화강 유역의 하르빈 지역에서 부여(북부여/ 해모수)가 건국되었으며, 여기에서 동부여(또는 후기부여/ 해부루)가 파생되었고, 추모왕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이주하여 졸본부여, 고구려를 압록강 유역에 세웠고 고구려는 고조선의찬란한 문화를 이어 동북아의 패자역할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발해 역시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강대국이었으며 당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228년간 존속했던 그곳 대부분이 간도에 속한 땅이다”는 말을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러시아 연해주 중북부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698~926)의 왕성(王城) 규모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사실 앞에서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며 가벼이 지나치고 말 것이고 또 지난 해 중국이 연변주의 장동유적지, 동풍유적지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실시, 하(상)나라 때부터 한(漢)나라까지의 도자기, 석기 등 문화재 300여 점을 발굴했다며 고고학사업에서 전에 없던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에도, 그렇겠지, 중국은 역사가 깊고 물질문명이 앞섰던 대국이니까 그런 유적이 끝도 없겠지,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 것이다.
과연 그럴까. 토기 및 석기 유물이라면 한나라 때는 아닐 것이고 하(상), 은, 주나라 등의 한족 고대국가의 위치는 연변 주변에서는 수천 리 떨어진 산서성 아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마한과 번한 옆에 있었던 나라였다는 것을, 연변 지역은 곧 단군왕검들께서 직접 통치했던 진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우리들 조상의 유물들이 한(漢)족 조상들의 유물이 되고 마는 것을 안타까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워/ 차갑게 내 살을 에는구나/ 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원문생략, 이덕일 사랑에서 인용)
1910년 8월 말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자 서울의 소론 명문가였던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그해 1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듬해 정월에는 안동의 남인 명가 이상룡(李相龍)과 김대락(金大洛)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때 이상룡은 위 시를 읊으며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만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고, 그 취지서를 “부여의 옛 땅은 눈강(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은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의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은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포들이 아닌가”라고 선포하였다.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는 서기 1712년(숙종 8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의 제안에 의해 세워진 경계비다. 비면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 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이라고 각서하였다. 오라총관 목극동이 황지를 받들고 변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며 분수령 상에 비를 세워 명기한다는 것이다.
이 토문강(土門江)이 도문강(圖們江)이 되어 즉 쑹화강(松花江) 유역이 두만강(圖們江)을 경계로 한다는 것으로 변질, 왜곡시켜왔다는 것이다.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인정받게 되면 네덜란드와 스위스보다 더 큰 면적, 4만2,700 평방km의 조선자치주 등 간도지역이 모두 중국 땅이 되고,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 인정되면 한국 땅이 되는 것인데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던 1700년대 초에는 중국의 역사책에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하는 강, ‘토문강’으로 기록된 데 반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분쟁이 점차 격화된 1880 년 대 중반 이후부터는 ‘토문강’과 ‘도문강’으로 혼재돼 쓰였으며 190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도문강’(두만강)으로 바꿔 기재되었다는 것이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박선영 교수는 학술지 ‘중국근현대사 연구’에서 “청사고(淸史稿) 등 1700년 대 초에는 토문강(土門江)으로, 1880년대 발간된 책에는 도문강(圖們江)으로 중국이 간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이렇게 조작해 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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