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백뿐인 VA 주 하원의원에 도전장 그는 누구?
워싱턴 생활 14년. 토박이로 불릴 만큼의 연륜을 쌓았지만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가끔 95년산 ‘혼다 씨빅’을 몰고 주류사회 행사장에 당당하게 나타나 논리정연한 언설(言說)을 쏟아놓는 모습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러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고 정치경제가 요동치는 격랑의 2009년에 그는 스스로의 족쇄를 풀었다. 그리고 정치란 새로운 물결 위에 자신을 올려놓았다. 올 11월 실시되는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민 마크 김 변호사. 4살 때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말을 1세처럼 구사하고 날카로운 외모와 달리 어려서부터 배인 겸양의 격률로 스스로를 다져온 이 마흔 둘의 청년. 오바마 대통령을 스스럼없이 ‘친구’ 라 부르는 이 신예는 도대체 뭘 믿고 미국의 역사를 쓴 ‘처녀의 땅’에서 본류의 정치에 뛰어들었는가.
사이공.서울.시드니서 유년시절 보내
대학때 전국 한인대학생 조직 활동
2004년 오바마 상원도전 도우며 인연
“하원 입성 한인.소수계 대변” 포부
서울과 사이공, 그리고 시드니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4살 때 월남으로 떠났다. 군목(軍牧)으로 파병된 아버지를 따라서였다. 아버지는 사이공의 유일한 한인교회를 세웠다.
그러다 75년 봄 패망하는 사이공을 뒤로 하고 아홉 살 그와 가족은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는 교회를 챙기느라 남아 있다 사이공 함락 다음날 체포돼 1년이나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없는 서울은 피난지나 다름없었다. 돈도 집도 없었다. 간신히 마포의 한 아파트 단칸방에 몸을 누인 가족들은 소식 없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신용산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난생 처음 한국 학교에 입학한 겁니다. 한국 얘지만 한국말도 딸리고 친구들 사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76년 5월 아버지는 석방돼 귀국했다. 고생 끝에 수척해졌지만 돌아온 영웅 대접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접견하고 강연회마다 불려 다녔다.
“아버지나 가족들은 한번 외국생활 경험이 있었기에 70년대의 혼란스런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의 한국말이 서툰 것도 맘에 걸렸나 봅니다.”
스스로 역마를 꿈꾼 건 아니었다. 이념과 삶이 대립해온 거친 생존의 역사에 어린 그는 저절로 떠밀려 외지를 떠돌았다. 마침 호주가 탈(脫) 백호주의를 선언하며 아시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들은 그 첫 남진대열에 합류했다. 76년 아버지는 시드니에 첫 한인교회를 세웠다.
그러다 1980년 가족들은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호주는 미국의 50년대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뜻을 펼치기엔 적당치 않았습니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자고 결심한 것이지요.”
다시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14살. 다시 시작이었다. 가족들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했고 그는 미국의 중학생이 됐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목회자의 아들’은 그에 따라다니는 숙명의 레테르였다. 자연 사회봉사의 삶에 익숙해져야했다. 새로 이민 온 한국 학생들의 영어 통역과 교회에서의 주말 봉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주일학교와 중고등학생 지도는 물론 여름 캠핑도 책임을 맡았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전국의 한인 대학생을 조직해 대표를 맡아 3개월간 언어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제 인생에서 한 번도 봉사가 빠진 적이 없어요. 모태신앙에 아버지의 목회를 도우며 자연스레 봉사의 개념을 배웠고 커뮤니티 일을 익혔습니다. 대학에서는 주류 학생회 회장을 맡아 리더십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이중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거지요. 그게 제 라이프 미션이 됐습니다. 제가 정치를 하게 된 것도 아마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캘리포니아대(UC) 어빙에서 정치학을 선택한 것이나 샌프란시스코의 UC 헤이스팅 법대에서 법을 전공한 것도 어찌 보면 삶의 자연스런 진행과정이었다.
워싱턴을 향한 연민
서부에 살았지만 동부는 늘 그에게 꿈의 동산이었다. 88년 워싱턴 D.C.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듀카키스 민주 후보 캠페인에 뛰어든 그는 난생 처음 워싱턴을 찾았다.
“날씨나 숲, 사람들의 생각 모두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난 동부 사람 체질이구나, 언젠가 다시 동부로 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로스쿨을 졸업하고 워싱턴으로 이주할 기회가 왔다. 95년 연방통신위원회 행정 변호사 일을 맡은 것이다.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연방 중소기업청(SBA) 변호사로 자리를 옮겼다. 소수계와 여성 기업인들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2001년부터는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민주)의 법률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중앙 정계에 그의 존재를 알렸다. 한편으로 그는 1.5세와 2세 조직인 KAA 활동과 함께 한미연합회(KAC) 창립 멤버로 뛰었다. 2002년부터는 버지니아 주지사 아시안 자문위원으로 목소리를 냈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인연
그는 오바마 대통령을 ‘친구’라 부른다. 그가 모신 더빈 상원의원은 오바마와 같은 일리노이주 출신에 민주당이었다. 오바마가 상원의원 후보가 되면서 인연은 시작됐다. 2004년 캠페인부터 그는 적극 도왔다. 흔한 정치인과 스탭 사이의 관계가 아니었다. 매주 얼굴을 맞댔다. “나이도 5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다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이나 법을 전공한 것도 비슷해 만나자마자 친해졌습니다.”
마크 김이 2007년 1월 의회를 떠나 버라이존사 부사장으로 옮기면서 그는 오바마에 모금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대선을 향한 민주당 경선 릴레이가 시작됐고 그는 아는 의원들과 정치인들마다 전화를 해 오바마 지지를 호소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너 미쳤나. 뭐 오바마를 서포트하라고?” “넌 정치감각이 없구나.”란 걱정반 조롱반에서 “너 오바마 지지하면 워싱턴에서 갈 데 없어진다”는 협박도 받았다.
그는 네바다와 캘리포니아주를 찾아 전화와 가정방문을 통해 오바마 지지 캠페인을 벌였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버지니아 훼어팩스 지역 선거 캠페인 총 책임자가 되어 1년 넘게 지휘했다. 그래서 별명이 ‘오바마 가이’였다.
왜 선거에 도전하나
선거 캠페인은 그를 버지니아 민주당의 차세대 주자로 부각시켰다. 주류 백인들은 “노던 버지니아도 이젠 변했다. 소수계도 할 수 있다. 이젠 네가 한번 해봐라”고 권했다.
지난해 덴버에서의 민주당 전당대회에 그는 유일한 한인으로 참가했다. 거기서 만난 팀 케인 주지사, 짐 웹과 마크 워너 상원의원 모두 출마를 권유했다.
“사실 돈을 벌거나 오바마 정부에서 임명직으로 가는 게 저한테는 편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인과 이민자, 소수계의 커뮤니티에서 성장했고 그들을 위해 일해왔습니다. 이제 주류사회서 날개를 펼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온 사회봉사의 삶의 길의 하나란 생각이었고 그래서 가장 위험스런 선택을 했습니다.”
지역구와 당선 가능성은
그가 선택한 지역구는 버지니아 제35지구. 훼어팩스의 비엔나와 옥턴, 던 로링 지역을 포함한다. 오바마 캠페인 때 그가 맡았던 곳이자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민주당 경선에는 5명이 나섰다. 다행히 민주당 핵심 66명 중 30명이 그를 공식 지지하고 있다 한다.
“저는 민주당 백인 주류와 젊은 층, 그리고 한인등 소수계의 표를 모을 수 있다고 봅니다. 경선은 큰 문제없이 통과할겁니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그는 버지니아의 주 이슈를 크게 교육과 교통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부인인 알렉스 김 변호사와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그 역시 학부모라 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훼어팩스의 교육의 질이 좋다지만 예산이나 교사 봉급 등 자꾸 질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지금 교육에 투자하고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으면 10년 뒤 우리 자녀들이 피해를 봅니다. 교통도 가는 곳마다 길이 막힙니다. 장기적 과제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의 정치적 비전
“많은 정치인들이 퍼블릭 서비스란 초발심을 잊어버립니다. 어떤 직책을 다음에 이루려는 과정으로만 생각합니다. 정치란 2-3년의 캠페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책이 더 중요합니다. 우선 저의 목표는 더 경험과 경륜을 쌓아 훌륭한 주 의원이 되는 겁니다. 제 개인적 야망보다 커뮤니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리치몬드 상하원에는 소수민족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동안 백인과 흑인의 입장만 있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아니라 자랑스런 한인과 이민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리치몬드에 가려 합니다.”
마크 김 선거캠프
전화 703-350-7377
웹사이트 www.MarkKeam.com
주소 Keam for Delegate
P.O. Box 1134
Vienna, VA 22183-1134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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