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세계사에서 대공황만큼 큰 경제적 사건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사태가 왜 벌어졌으며 어떻게 해결됐느냐에 대해 온갖 학설이 분분하지만 아직도 정설이 없다.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씨름하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욕만 잔뜩 먹고 물러난 허버트 후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대공황의 원인은 1914~1918년의 전쟁에 있다”고 썼다. 대공황이 발생한 것은 근본적으로 제1차 대전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얼핏 책임 회피 같기도 하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1차 대전 기간 중 유럽에 농산물을 수출하며 호시절을 누렸던 미 농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정상을 되찾자 수출 길이 막히면서 넘쳐나는 농산물로 고통을 겪었다. 곡물가는 하락하고 경작을 늘리기 위해 농기구를 사들이느라 진 빚은 그대로 남았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연방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 파산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유랑민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1차 대전 종전으로 어려워진 것은 농민만이 아니었다. 유럽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제조업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곳으로의 수출길이 막힌 대기업들은 이미 과잉 상태인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증권 투자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주가 폭락이란 비극의 싹은 이렇게 트기 시작했다.
많은 사가들이 대공황이 1929년의 주가 폭락과 함께 시작됐다고 적고 있지만 실제로 경제가 망가진 것은 은행의 도산이 잇따르면서부터다. 1930년 12월 40만 명의 고객을 갖고 있던 유대계 은행 뉴욕 미국 은행(Bank of the US)이 문을 닫았다. 당시까지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인 이 은행 파산으로 금융계는 마비되기 시작했고 ‘US’라는 이름 때문에 해외에서는 미국 중앙은행이 넘어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듬해인 1931년에는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인 크레딧안슈탈트가 동구권 경제의 몰락과 함께 파산, 유럽 은행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이 한 해 동안 미국 내에서만 2,000개의 은행이 폐업했다. 그전까지 일시적인 불황으로 여겨졌던 것이 ‘대공황’으로 인식된 것도 이 때부터다.
대공황이 바닥을 친 것은 193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취임하면서 ‘은행 휴일’을 선언, 모든 은행 문을 일시적으로 닫고 예금 정부 보증 약속과 함께 부실 은행을 정리하면서부터다. 그제서야 서서히 미국 경제는 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드디어 금융권 안정을 위해 은행 국유화의 칼을 빼든 모양이다. 연방 재무부는 23일 최악의 상황이 올 때 미 20대 주요 은행들의 자본 건전도를 조사해 필요하면 이들 주식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은행을 인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일차 대상으로는 이미 450억 달러의 지원을 받은 시티그룹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 대가로 받은 우선주를 일반주로 전환하면 연방 정부는 이 은행 주식의 40%를 가진 대주주가 된다. 은행 경영권을 확보한 후 부실 채권을 정리하고 은행을 다시 개인 투자가들에 팔겠다는 계획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금기 사항이던 은행 국유화가 이처럼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은 현재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가를 말해준다. 철저한 시장주의자인 앨런 그린스팬 전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 의장과 그와는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폴 크루그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모두 일시 방편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외에는 금융권을 안정시킬 방도가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초 비슷한 금융 위기를 겪었던 스웨덴은 은행 국유화라는 해법으로 경제를 살린 바 있다. 그러나 그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미국이 이 방식으로 살아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융 안정이 전제되지 않고는 경기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연방 정부가 국유화라는 극약 처방을 했는데도 금융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올 연말 경기 회복도 요원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오바마 정부가 하루 속히 금융이 숨 쉬도록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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