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동포 여러분의 곁을 이제 떠나려 합니다. 정을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을 제게는 말로써 다할 능력이 없습니다.
3년 전 총영사로 워싱턴에 오는 비행기 속에서 생각은 구름 속이었습니다. 미지의 동포사회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막연하였습니다. 현장을 모르니 계획이 있을 수 없었지요. 그저 각오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과 머리를 다해’ 일하자고.
‘몸으로’ 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행사에 뒤늦게 도착하여 송구한 일들도 많았지만, 미국처럼 좋은 고속도로에서 버지니아 비치, 웨스트버지니아, 리치몬드 정도는 가벼운 여행이었지요. 애난데일과 볼티모어 사이를 누비고 다닌 10만 마일이 눈에 선합니다.
공인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세 중 하나가 균형(balance)이 아닌가 합니다. 20만 속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때로는 버거웠지요. 직업, 학력, 빈부, 단체의 규모 등 세속적인 기준에 진실로 구애받지 않고 모든 분들과 가깝고 싶었습니다. 다만 초청을 받고도 가서 뵙거나 만나지 못해 서운해진 분들이 응어리로 남는데, 행사가 겹쳤거나 다른 사정들 때문이었을 거라고 바다처럼 넓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임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오늘의 한인사회를 만들어 놓으신 이민 1세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미국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시게 일하는 1.5세들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를 꾸려나갈 2세, 3세들은 더더욱 미덥기 때문이었지요.
더러는 마음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참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인내와 관용으로 안될 일은 없겠지요. 더구나 동포의 위치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자기보다는 남을 돕는 일, 공동체를 위한 일, 다른 인종과 화합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 약하고 낮은 곳에 있는 분들께 마음의 한쪽이나마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동포사회의 역사와 공동체의 복잡한 구조를 모르고, 더구나 잠시 스쳐 지나가는 영사에게 무슨 큰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두어 명의 영사에게 20만 동포사회는 산처럼 무거운 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캄캄하고 막막하며, 희미하게 알 듯 하면 떠나야 합니다.
버지니아 텍 사건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한인여성들의 성매매 사건도 마음 아픈 일이었지요. ‘요코 이야기’ 책은 참으로 우리를 화나게 했습니다. 위안부 결의안은 정말 우리들의 쾌거였는데, 독도 주권이나 동해 표기 문제들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역사를 알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민족 최고의 자랑인 한글을 알게 하고, 이민 1호 서재필 박사가 늘 우리를 바라보며 서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컬페퍼의 코리아 마을에도 그들의 우정에 감사하면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정치군사 대국이 아니라 문화대국이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영사관을 멋지게 꾸며서 우리의 미술 수준을 뽐내보고 싶었지요. 창구 직원들이 친절치 못한 점이 있었다면, 너무 많은 분들을 대하다가 자칫 실수한 것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21세기의 시작에 서서 우리의 이민역사를 되새겨 봅니다. 오늘날 한인회, 직능단체, 봉사단체, 동호 친목단체, 헤아릴 수 없는 모임들이 한인들의 결속력을 말해줍니다. 물론 고칠 것도 많겠지만,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특성이요 자랑인 것 같습니다. 정말 우리끼리는 비방보다는 칭찬을, 분열보다는 화합하기를, 그리하여 모든 미국 사람들이 입을 모아 우리를 참 훌륭한 민족이라고 치켜 주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다시 덜레스 공항을 떠나갑니다. 비행기 속에서 여름 밤하늘과 같은 워싱턴 한인사회를 그려 보겠습니다. 홀로 빛나는 별처럼 걸출한 분들, 무리를 지은 별자리들처럼 훌륭한 단체들, 헤아릴 수 없는 은하수처럼 아름답게 모인 군중들…. 모든 별들의 대합창처럼 아름다운 한인사회가 되기를 손 모아 빌며, 이렇게 지면으로 하직의 인사를 드립니다.
매우 그리워하게 될 워싱턴 동포 여러분, 그 동안의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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