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자유토론광장 대표
LA의 한 식당에서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서울의 국회에서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식당에 모인 100여 명의 한인 중 한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식 인정받게 됐다. 동포사회 분열을 우려하지만 우리가 가져야할 권리보다 앞설 수 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순간적 감동으로는 그럴 수 있는 장면이다. 이국 만리 떨어져 그리던 모국에서 참정권을 선물하다니 감동이 없을 리 있을까. 하지만 앞뒤를 지켜보면 투표권이 가져올 후과가 너무나도 두렵기만 하다.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국민의 기본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국방과 납세 의무이다. 도덕적으로도 이 같은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재외국민에게 직접 정치참여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국내 동포와의 형평성에서도 어긋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결격사유를 지닌 셈인데 덜컥 투표권을 부여하다니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만 국민 대접을 받는 건가. 해외 나와 살더라도 조국을 위해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분단된 조국 통일 운동에 내외 국민 누구를 막론하고 참여해야 한다. 모국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구원의 손길이 절실할 때 해외동포들이 제일 먼저 나서야 한다. 조국이 어느 나라의 침략을 받는다거나, 독재자가 나타나 민주체제를 짓밟거나 할 때도 해외동포들의 분발이 절실할 것이다. 이같이 도덕적 범주에 속하는 구국활동도 훌륭한 해외동포의 애국적 사명으로 따로 있는데 갑자기 홍두깨 격으로 무슨 투표권 부여 소동인가.
미국 대도시 화교 타운에 국민당 깃발이 내걸려 있는 것은 장개석 정부를 지지하는 중국인들이 공산당과 대결하여 고토수복의 숙원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상대 당과 간판 마주 달아놓고 선거활동 하자는 게 아니었다. OECD 30개 회원국 중 슬로바키아를 제외하곤 재외국민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하지만, 각 나라 사정에 따라 실질적으로 영주권자에게까지 투표권을 주는 나라는 별로 없다.
우리나라 재외국민 분포는 영주권자 145만 1천여, 일반 121만 1천, 유학생 33만4천 등 도합 299만 7천명에 이른다. 유권자 강원도 120만, 충북 180만을 웃도는 재외국민에 투표권을 주면서 사전에 무엇을 연구 검토했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법안 통과 이전에 공청회, 토론회, 여론조사도 한 번 없었으니 법 제정 수준도 한심하지만 법안 자체를 인정할 가치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해외 주재 공관들은 이 법안 상정에 앞서 진지하게 교포들의 의사를 수렴해본 일이 있나? 투표권 부여 후 일어날 각종 효과와 폐해를 면밀히 분석 보고한 일은 있나? 해외에서 활동하는 특파원들, 국가 최대 정치행사인 대선과 관련하여 어마어마한 투표수가 거래되는 재외국민 참정권에 대해 한 줄이라도 취재 보도한 적이 있나?
해외동포 투표권은 단순히 몇몇 국회의원의 대 교포 아부용 시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교포단체 간부들과 교포들의 눈치 보는 정치인들이 밀거래할 내용은 더더욱 아니다. 같은 동족으로 해외에 나와 본토 땅 4분의 1을 갈라놓고 향우회를 조직하는 국민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민족이 달라도 해외에 나오면 일단 단결이다. 고국의 조그만 향리, 출신학교 친목회 등의 정서적 협동 차원이 아니고 편부터 갈라 따로따로 놀자는 도별 향우회를 아무 거리낌 없이 조직하는 게 우리 국민성이다. 국내에서도 ‘영호남은 투표하지 말고 인구비례로 표 계산 하는 게 국가 선거예산 절감에 좋을 것’이라는 자조적 탄식이 있을 정도다. 본국 정부가 솔선하여 교포 단결을 고양하지 못할망정 앞뒤 못 가린 투표권이라는 분열의 시한폭탄을 투척하다니 참으로 아찔한 일이다.
해외동포 선거 관리는 어떻게 할 셈인가. 외국에 와서 조사권이나 선거관리 단속권을 행사할 수 없지 않은가. 해외동포들이 국내 현장 감각은 떨어지고, 따라서 후보들 자질은 잘 모르겠고 “에라 모르겠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 고향사람 찍자”며 향응, 금품수수 등 부정선거 행위를 저지를 때 어쩔 셈인가. 이런 판국에 속된 말로 표 몰아준 자와 정치인 사이에 부정 비리 특혜가 파생될 걱정은 안 해봤나? 각 대도시 한인타운에 플래카드 내걸리고, 후보들 거리행진하고, 각종 구호 외치는 추태를 상상이라도 해봤나? 수십 수백 마일 떨어진 투표장 문제는 또 어쩌나?
지난 60년대 박정희-윤보선의 두 차례에 걸친 대결에선 각각 5만, 15만, 15대(김대중-이회창) 39만, 16대(노무현-이회창) 57만 표 차이였다. 재외동포 투표 예상치는 135만 내외다.
앞으로 국내 대선 통계상 양자 대결구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이명박-정동영 대결처럼 가지 않고 백중세를 이루게 된다면 해외동포의 투표가 대통령 당락을 좌우할 수도 있다. 국내 대선을 해외동포 투표에 승부를 건다? 너무나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누가 떨어질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재외국민 투표는 재앙일 수밖에 없다.
똑바로 조국을 사랑하는 의식있는 국민이라면 투표권을 결연히 거절해야 맞는 말이다. 투표하는 재미로 시민권 신청을 늦추는 일까지 유행이 될까봐 걱정하면 기우일까. 해외국민 투표권 법안 무효화에 모두 나서야 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