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우리는 ‘염치’라고 부른다. 이것은 법이나 규정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명령이요 양심의 목소리다. 법 이전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치 있는 사람은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멈추고 양보할 줄 안다.
이것이 넓게 뿌리를 내리면 사회적인 규범이 된다. 우리 사회는 염치를 대단히 중시해 왔다. 염치없는 사람들을 아주 낮게 여겼다. 아무리 백 사람의 재주를 가졌다 해도 염치를 모르는 사람은 중히 쓰는 일을 경계했다. 지금도 몰염치 혹은 파렴치 하다는 말은 듣는 이의 낯을 뜨겁게 만드는 모욕이다. 염치가 살아 있는 사회라면 아직은 제대로 서 있다는 뜻이다.
월스트릿 발 금융쓰나미로 촉발된 위기로 세계 경제가 흔들거리고 있다.
잘 나가던 기업들도 예외 없이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면서 경영진들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아무리 외부적인 상황과 여건에 따른 어려움이라지만 경영진들의 입장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경제위기 속에서 책임을 대하는 경영자들의 태도가 문화권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지난해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는 70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글로벌 경제위기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손실은 봤지만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GM을 누르고 점유율 1위에 올라서는 등 성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첫 손실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도요타 경영진의 표정은 죄인들의 그것이었다. 뉴욕 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이들이 회견장에서 모두 일어나 허리 숙여 사죄하는 모습을 프론트페이지에 크게 실었다.
일본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수치심이다. 일본인들의 이런 경향을 처음 체계적으로 설명 한 사람은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이다.
베네딕트가 분석하고 있듯 일본인들의 수치심은 죄의식과는 다르다. 그저 수치심을 견딜 수 없어 할 뿐이다. 염치의 표현이 너무나 일상화 돼 있다 보니 간혹 진정성이 의심될 정도다. 도요타 경영진의 사죄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본 경영진의 태도가 ‘염치 과잉’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미국의 기업인들이 있다. 이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염치 결핍’이다. 특히 구제금융으로 생명을 부지하는 상황임에도 지난 연말 무려 184억달러의 보너스 잔치를 벌인 월스트릿의 몰염치에는 할 말이 없다. 오죽하면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부끄러운 짓’이라고 질타했을까.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미국의 양극화는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다. 상위 계층의 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쟁과 분배에 있어 어느 정도 합리적인 룰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자유주의 확산과 함께 약간의 우월적 지위와 능력이 보상에서는 엄청난 차이로 작용하는 승자독식 사회로 미국이 변모하면서 양극화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일반 근로자의 수백 배에 달하는 최고 경영자의 연봉액수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것을 아주 당연시 하는 이들의 의식구조이다. 처음에는 주주들과 국민들의 눈치도 보곤 하던 이들이 지금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천문학적인 돈을 챙겨간다. 경영자 영입 경쟁의 거품 속에서 자기가 받을 돈을 자기가 결정한 후안무치한 CEO들도 적지 않았다.
회사야 어찌됐든 받을 것은 한 푼도 빠짐없이 다 받아야 한다는 태도에 대해 월스트릿 위기를 예견한 책 ‘검은 백조’로 유명한 뉴욕대의 나심 탈레브 교수는 “이윤은 사유화 하고 손실은 국유화 시키는 얌체 행위”라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몰염치한 행태라는 것이다.
보상체계는 경영자의 건전한 이기심과 자부심을 자극해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건전한 이기심과 탐욕의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 경계를 그어주고 무분별한 탐욕을 제어해 줄 수 있는 것이 염치이다.
현 경제위기는 이런 염치를 상실한 자본주의가 초래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 같은 위기가 또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단기적인 경기회복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염치와 같은 사회규범의 회복(한때나마 그런 것이 존재했었다면)이 필요하다. 염치의 회복이 곧 바로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우선 법과 제도로나마 탐욕을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 조만간 발표될 규제 방안에 기대와 관심이 쏠린다.
또 이번 보너스 스캔들은 수많은 서민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면서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이런 탐욕에 대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야 한다. 염치가 없다면 눈치라도 보게 해야 하니 말이다. 염치없는 자본주의를 이제는 종식시켜야 한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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