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루아’라는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화제의 와인 1945년산 ‘샤토 무통 마이어’는 프랑스 보르도 산 ‘샤토 무통 로실드’를 모델로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해 만들어진 와인이라 승리를 상징하는 V자를 레이블에 그려넣은 이 와인은 전쟁 때문에 생산량도 많지 않은데다 그해 작황이 너무 좋아서 와인애호가들에게는 꿈의 와인으로 꼽힌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 와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다가 1억5,000만원(약 11만달러)을 지불하고 손에 넣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45년산 무통 로실드는 귀하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니고 1만달러정도면 지금도 살 수 있는 와인이다.
와인 한 병에 1만달러라니, 하고 놀라실 분들이 많겠지만 1만달러가 아니라 수만달러가 넘는 와인도 세상에는 수두룩하다. ‘로마네 콩티’나 ‘페트뤼스’, 나파 밸리 ‘컬트와인’ 같은 것들은 처음 나올 때부터 병당 수천달러를 호가하고, 해가 갈수록 비싸지는데 빈티지(포도 수확연도)가 좋은 와인일수록 오르는 폭이 훨씬 크다.
이런 얘길 해주면 사람들은 묻는다. “1만달러짜리 와인은 1만달러어치쯤 맛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그건 아니다. 와인의 맛과 가격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마다 팔레트(입맛)가 달라서 일률적인 판단 기준을 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제 LA타임스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다. 캘리포니아 와인대회의 심사과정을 4년동안 조사한 결과 심사위원들이 같은 와인을 여러번 블라인드 테이스팅 했을 때 매번 동일하게 평가하는 비율이 10%밖에 안 되더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조차 이러니 사람의 입맛이란게 기계처럼 점수와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대략 저가 와인의 경우는 맛과 가격이 비례한다. 예를 들어 5달러짜리보다 10달러짜리 와인은 2배 더 맛있다. 10달러짜리보다 20달러짜리 역시 2배 정도 더 맛있다. 30달러짜리는 대략 3배 정도 더 맛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100달러짜리가 50달러짜리보다 2배 더 맛있느냐 하면 꼭 그런 건 아니다. 100달러가 넘어가는 와인들은 더 어려워진다. 100달러짜리나, 200달러짜리나, 300달러짜리나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인데 가격은 오히려 큰 폭으로 달라진다.
왜 그럴까? 명품 와인의 가격은 맛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많이 몰리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물건의 품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데 원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값이 오르는 것이다. 2004년 이후 와인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 돈은 넘쳐나는데 쓸 곳이 없던 부자들이 새로운 투자대상으로 눈 돌린 품목이 와인과 미술이었다. 특히 중국과 인도의 젊은 신흥부호들이 엄청나게 ‘돈질’을 해대는 통에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장은 매일 기록에 기록을 경신했고, 낙찰가는 ‘억억’대며 올라갔다.
유명한 보르도 5대 샤토의 경우 2005년산 라피트 로실드나 라투르 같은 것은 작년에 출시되자마자 병당 2,000달러, 페트뤼스는 8,000달러까지 호가했다. 아무리 빈티지의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라피트 1999년산이 150달러, 2000년산이 500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이건 뭐 말로 할 수 없이 오른 것이다. 그렇게 오른 만큼 와인 맛이 좋아졌을까? 결코 아니다. 똑같은 땅에서 열리는 열매가 갑자기 몇 배나 더 맛있어질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나같이 선량하고 가난한 와인애호가들은 정말 울고 싶을 정도였다. 진정한 맛도 즐길 줄 모르는 투기꾼들 때문에 3년전 100달러 하던 인시그니아를 올해는 200달러나 줘야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가 말이다.
그런데 요즘 와인 값이 조금씩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히 가격에 거품이 꼈던 비싼 와인들일수록 큰 폭으로 내려 ‘제값’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몇년간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던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장이 작년 10월부터 된서리를 맞고 있다고 한다. 내가 자주 가는 와인샵에서도 꽤 큰 폭으로 가격을 인하한 와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모두들 끝을 알 수 없는 이번 경기침체에 걱정이 많다. 나는 이 경제 위기가 가짜는 가고 진짜만 남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와인뿐 아니라 허영에 들떴던 모든 것들,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조차 기름은 빠지고, 거품도 꺼지고, 모든 것의 가치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정숙희
특집 1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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