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춘(Fairfield Trading 대표)
해마다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두 여인(麗人)이 있다. 오라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서 너 살 꼬마들 보다 큰 이민가방을 4개씩이나 끌어안고 내린 케네디 공항 대합실은 마치 허허벌판과 같은 느낌이었다. 꼬마들과 파김치처럼 널부러져 있을 때, 아내의 대학 동창인 미세스 변이 남편과 함께 커다란 미제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 때는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첫 번째 여인(麗人)이었다.
반기는 사람도 없는 넓은 약속의 땅, 광활한 미국이란 미지의 나라에 정착지도 없이 그냥 비행기 표만 달랑 끊은 곳이 뉴욕이었다. 하긴 미 대사관 인터뷰 때는 목적지가 ‘보스턴 메사추세츠’라고 앵무새처럼 외어댔지만 그곳도 일면식 있는 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그냥 인터뷰용 지명이었다.
공항에서 둥근 지붕의 체크무늬 노랑 택시를 불러 짐을 나눠 싣고 그녀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직장에서 제공한 병원 근무자 부부 두 사람만 살 수 있는 스투디오 단 칸 방이었다. 네 식구가 하룻밤 잠자리 신세도 지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다시 가방을 챙겨 그들이 잡아 준 모텔에서 꿈에도 그리든 아메리카 땅에서 첫 날밤을 그렇게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는 일이, 한국인 특유의 큰 목소리 콩글리쉬로 공항 대합실에 비치된 호텔 직통 전화를 붙들고 잠자리를 물색하였으나 기백 달러가 훨씬 넘는 곳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모두 뉴욕의 오성 급 일류 호텔들이라 이민 가방을 들고 들어갈 호텔은 아니
었다. 당시 해외여행은 일부 특정한 정치인이나 기업인이었고 해외여행자에게 안보교육을 정보부에서 시켰을 때이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나 보다.
아파트 물색은 병원 근무를 하는 미세스 함이 쉬는 날을 맞아 일일이 아파트를 찾아다니며 수펴를 만나 빈 방을 물색하여 가까스로 1베드룸 한 칸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는 친구의 친구 부인이었다. 그러니 나 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생소한 남이었지만 그때만 하여도 7번 전철 안에서 한인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더 이야기 하다보면 전화번호 교환하며 외롭지 않게 지내자고 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 다리 걸친 친구의 부인이긴 해도 복덕방이란 영어단어가 무언지도 모르는 처지에 ‘리얼터’를 대신하여 한 나절 동안을 품 내어 수고해 준 그 여인의 고마움도 잊을 수가 없다. 그녀의 직업이 ‘백의의 천사’ 간호사였기 때문인지 그녀는 천사 같은 아름다운 심성의 두 번 째 여인(麗人)이었다.
세월이 흘러 다섯 손가락에 꼽을 후속 이민 세대가 나의 집을 거쳐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갔지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떠나간 사람도 있었고, 사소한 일에 감정상하며 간 사람도 있었다. 넓은 응접실에 재우지 않고 차고 옆 작은 침실에 머물렀던 일이 문간방에서 재워준 홀대(忽待)였다고 하는 가정도 있었고, 두 세대가 한꺼번에 올적에는 그들의 커다란 이민 가방을 차고에 보관했다고 섭섭해 하던 사람도 있었다.내가 겪었든,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을 생각하며 선행한다고 공항픽업까지 하여
재워주고 먹여주며 거처마련까지 해준 일이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흡족하지 않았던지, 칭찬은커녕 뒷소리만 무성하였던 일도 이제는 잊어버린 옛 얘기가 되었다.
글로벌 시대. 세상이 좁아졌다. 한국인에게 그토록 높던 미국의 문턱이 비자 없이도 드나드는 세상이 되었다. 오래전 하와이 여행길에서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온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머지않아 한국의 초등학생들도 뉴욕으로 수학여행을 쉽게 오는 날이 있지 않을까 싶다.며칠 전 한국에서 법관으로 재직 중인 조카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삼촌, 오는 2월 중 콜럼비아 대학교로 연수를 받으러 가게 되었어요.” 하며 가족 다 데리고 가야하니 단기간 머물 아파트나 주택을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피를 함께 나눈 조카 네가 온다니 반갑기도 하지만 그가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 삼촌의 역할을 어느 등급으로 매길까가 벌써부터 조심스럽다. 제발 아름다운 여인상(麗人像)으로 남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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