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해서 너무 비싸고
너무 비싸서 너무 안팔린
매니 라미레스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타고가다 사고를 당해 왼팔이 부러졌다. 어렵사리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니 같은 버스에 타고있던 승객들이 다 죽어버렸거나 초죽음이 된 것 아닌가. 그 사람은 말한다. 나 참 정말로 재수 좋네.
다른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타고가다 사고를 당해 똑같이 왼팔이 부러졌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안다치고 오직 그 사람 팔만 부러진 것 아닌가. 그 사람은 말한다. 나 참 더럽게 재수 없네.
비교심리란 게 이렇다. 나만 놓고 보면 어디 하나 다를 게 없는 일을 당했는데도, 주변사람과의 비교심리가 작동하면 이처럼 정반대 반응을 보이는 게 다반사다. 그리고 비교심리의 추동력은 대체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주변사람들, 특히 자신이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경쟁심이다. 다른 누구는 몰라도 저 사람(들)보다는… 하는 심리가 끼어들기 쉽다는 말이다.
자신이 그 직전에 처했던 상황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 전에는 저랬다는 것이 기준이 돼 지금을, 지금은 이렇다는 것이 준거가 돼 다음을 제약하기 십상인 것이다. 이 경우 다른 사람들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마을호를 타는 데 길들여진 사람, 새마을호를 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특히 과시욕이든 뭐든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특급만 타도 온갖 짜증을 내고 신세한탄을 하고 자기가 특급을 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불만을 그치지 않는다. 그 특급이나마 감지덕지 마음으로 바글바글 들어찬 다른 사람들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돈 몇푼이라도 아끼려고 늘 걸어다니는 사람은 이따금 완행열차라도 탈라치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된다. 법칙은 아니지만 대개 그렇다는 얘기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매니 라미레스(36)는 새삼 설명이 필요없는 메이저리그야구 수퍼타자 중 한명이다. 2004년과 2007년 월드시리즈 챔피언 보스턴 레드삭스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다 올해 초가을 LA 다저스의 숙원풀기 사명을 띠고(물론 그 이전에 레드삭스구단과의 불화도 큰몫을 했지만) 남가주로 근거지를 옮겨 예의 거침없는 홈런포 등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초여름만 해도 포스트시즌까지 살아남을까 의심스럽던 다저스는 비록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댓바람에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치달았다. 긴급수혈한 라미레스가 큰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라미레스는 올시즌 뒤 FA(자유계약선수)가 됐다. 타자로서는 이번 FA시장의 최대 매물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저제서 입질도 많았다. 실제로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적어도 FA시장 안팎의 각종 보도로는 그랬다. 그랬던 라미레스가 지금 사실상 찬밥신세다. 너무 잘한 게, 그래서 몸값이 너무 올라간 게 도리어 짐이 됐다.
선수 나이 서른 여섯. 앞으로 언제까지 뛸 수 있을지, 더욱이 언제까지 지금같은 맹위를 떨칠 수 장담할 수 없는 라미레스는 ‘돈도 푸짐하고 유효기간도 긴’ 장기계약을 원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구단들의 생각은 달랐다. 실력은 인정하되 내구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극심한 불황까지 겹쳤다. 지갑 얇은 사람들이 고급백화점에 들러 눈에 쏙 드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가격표를 보고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슬며시 발길을 돌리듯이, 구단들은 라미레스에 군침을 꼴딱꼴딱 삼키면서도 섣불리 구애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FA시장은 개장 한달이 훨 지나버렸다. 그 사이에 라미레스와 함께 이번 FA시장 빅4로 불렸던 사나이들 가운데 C.C. 사바티아, A.J. 버넷, 마크 테셰이라는 뉴욕 양키스와 동거계약을 맺고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워낙 물건이 좋아 끝내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현재로선 라미레스만 손가락을 빨고 있는 처지다. 그런데 비싸도 너무 비싸다고 소문이 날 대로 난 터라 이제는 라미레스가 서있는 매장쪽으로 발길은커녕 눈길도 주는 이들이 드문 형국이다. 워낙 값비싼 몸이라 FA시장 초기에 낙찰이 되리라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예년 같으면 대략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새 정치를 결정짓고 성탄연휴와 연말연시를 맘 편하게 보낼 것으로 기대했을 라미레스는 이제 손님(구단)들을 향해 날 좀 보소 노래를 불러야 할 지경이다, 자존심 때문에 그나마도 속시원히 못하는 형편이지만.
이런 가운데 크리스마스인 25일 LA 타임스지는 라미레스가 장기계약 꿈을 미루고 다저스와 1년짜리 재계약을 맺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어차피 천문학적 금액으로 장기계약을 맺기는 글렀다는 판단 아래 일단 1년짜리로 거액계약을 맺어 자신의 가치를 다시 입증한 뒤 내년 FA시장에서 장기계약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전략이다.
지금까지 라미레스 관련 보도들이 다 그랬듯이 이 역시 어디까지나 전망이다. 그러나 라미레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장 현실성있는 대안으로 보인다. 나이 때문에 장기계약을 주저했던 구단들로선 연봉으로만 따져 몇백만달러를 더 주더라도 1년정도 실험투자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이다. 라미레스는 어차리 은퇴까지 보장이 안되는 어중간한 3,4년짜리 계약을 맺었다가 다시 FA가 됐을 때 헐값 취급을 받느니, 내년에 평년작만 낼 수 있다면 장기 대박계약에 재도전할 수 있다. 내년 FA시장은 올해처럼 불황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란 희망적 사고도 ‘FA 재수’ 생각을 부추길 수 있다.
만일 1년짜리 단기계약이라면 다저스 잔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다저스는 올시즌 종료 직후 라미레스에게 2년 4,500만달러 상당 재계약을 제의했다가 라미레스의 장기계약 주장에 밀려 철회했다는 게 정설이다.
레드삭스와 다저스에서 총 153경기에 출장해 가공할 타력(레드삭스에서 타율 3할3푼2리, 37홈런, 121타점 / 다저스에서 타율 3할9푼6리, 17홈런, 53타점)을 선보이고 그것을 지렛대로 초고액 장기계약을 노렸다가 도리어 잘 안팔리는 고가품 신세가 된 라미레스는 지금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앞날을 재고 있을까. 가장 잘 팔릴 줄 알았다가 지지리 안팔리는 지금의 심정을 어떻게 다잡고 있을까.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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