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이전에 감(感)이 익을 때까지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따라할 뿐!
1) 나는 하이웨이의 모세다. 내가 차를 몰면 차량행렬이 앞뒤로 쫙 갈라진다. 나는 우회전 전문가다. 조금만 길이 번잡하면 레인 체인지를 못해 목표지점을 놓치기 일쑤인데다 비보호 좌회전을 꺼려해 노상 우회전을 거듭하며 꾸역꾸역 돌아간다. 내 고물차 마일리지의 상당 몫은 주차장에서 올랐다. 남들 같으면 한번에 쓱싹 하는 주차를 두세번은 들락날락한 뒤에야 겨우 마친다.
운전 되게 못하네, 길눈 되게 어둡네, 소리를 자주 듣다보니 이처럼 내 나름 우스개성 대꾸 메뉴가 꽤 늘었다. 10년이 다 됐는데도 내 운전솜씨는 정말이지 엉터리다. 운전까막눈인데다 일말의 운전혐오증까지 있어서 내 운전솜씨가 매끈해지고, 덤터기로 길눈 핀잔을 듣지 않을 때가 오기나 할는지 자신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해야할 일’ 목록의 상단에 ‘운전 절대 안하기’가 들어있다.
어떤 연유로든 생각의 촉수가 운전에 닿을 때면 고교시절 은사 한분의 말씀이 떠오르곤 한다. 30년 전 그때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아서 흘겨들었던, 그러나 미국땅에 와서 별 수 없이 거의 매일 차를 몰아야 하는 생활을 하면서, 게다가 운전과 영 궁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더욱더 생각나는 말씀이다. 철도운전규정인가 화물운송규정인가를 가르쳤던, 고교(철도고) 선배이자 교사였던 그분의 말씀은 얼추 이랬다. 운전할 때 거리 재고 각도 재고 속도 재고 하나? 감(感)으로 하는 거야, 감으로! 감이란 건 생각만 한다고 오는 게 아니야. 감이 익으려면 하고 또 하고 정말로 열심히 연습을 해야 돼, 연습을!
2) 토니 그윈은 메이저리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왕년의 수퍼스타다. 지금 쉰을 앞둔 그는 1982년부터 2001년까지 20년동안 샌디에고 파드레스 선수로만 뛰었다. 영원한 3할타자,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 등 애칭에서 보듯 그는 동물적 타격감각의 소유자였다. 20년통산 타율이 3할3푼8리다. 초년병 시절과 은퇴를 앞둔 몇년동안 타격이 떨어지는 걸 감안하면 한창 때 그는 얼마나 더 가공할 타자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은퇴 뒤 ESPN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얘기가 재미있다. 타석에서 겪은 황당경험담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원정경기 때다. 그윈이 타석에 들어서자 엑스포스 포수 개리 카터가 난데없는 제의를 했다. 어떤 공이 들어올지 알려주겠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초구는 인사이드 중간쯤 패스트볼이라고 일러줬다. 그윈은 믿지 않았다. 공은 카터가 점지한 곳을 찔렀다. 스트라익. 그윈은 타석을 벗어나 구심에게 따졌다, 카터가 그러지 않게 해달라고. 구심은 그런 말을 제지하라는 건 규정집에 나와있지 않다며 그윈의 요구를 못들은 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터는 그윈에게 2구는 브레이킹 볼이라고 귀띔했다. 그윈은 또 스트라익을 먹었다. 3구째 그윈은 유격수 땅볼로 아웃됐다.
알려주지 않아도 쳤다 하면 안타다 싶었던 그윈은 왜 코스와 구질을 알려주는데도 당했을까. 그윈 말대로 초구 때는 카터의 말을 안 믿어서 당했다. 2구에 대한 카터의 귀띔을 그윈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설명은 없다. 그러나 전후사정으로 미뤄, 카터의 말을 믿느냐 안 믿느냐와는 별개로, 그윈의 생각이 복잡했던 것 같다. 3구 때도 그랬을 것이다. 초구 스트라익 뒤 타석을 벗어난 그윈이 구심에게 항의하면서 덧붙였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I don’t want to know what’s coming! I just want to react to what I see. 뭐가 들어올지 알고 싶지 않고 다만 본 대로 반응, 즉 감(感)으로 치겠다는 것이다.
태극권에서도 감(感)이 중시된다. 여기서 감은 지레짐작이나 어림짐작이 아니다. 감응이나 반응을 뜻한다. 일체의 예단이다 의도를 배격하고 그 찰나 그 조건에 맞춰 다만 반응하는, 반사동작이다. 태극권 고수들 역시 ‘생각 이전 감의 작동’에 방점을 찍고 있다. 서니베일 태극권 대학원 웡치슈 원장은 지난 12일 인터뷰에서 태극권이 추구하는 궁극은 도(道)에 있고, (무술적 측면에서) 겉으로 드러난 형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리액션(Reaction,반응)이라고 했다. 이 시리즈에서 몇차례 인용된 한국의 밝은빛태극권 박종구 원장이 홈페이지에 띄워놓은 태극권 강좌에서 응물자연(應物自然) 사기종인(捨己從人)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역시 좁게는 의념(생각)에 기대지 않는 조건반사로 해석될 수 있다(태극권을 무술이나 양생운동 차원을 넘어 ‘깨달음으로 가는 길’로 보는 박 원장의 본뜻은 이보다 훨씬 웅대하고 궁극적이다. 불가나 도가에서 말하는 무아/공 사상과 상통한다.)
운동적 측면, 특히 우열을 가리는 무술적 측면에서 반사동작은 선제공격보다 더딘 것 아닐까.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의도적인 선제공격’보다 ‘무아지경 반사동작’이 더 빠르다는 사실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됐다. 이에 대해서는 태극권 시리즈 초기에 소개된 바 있다. 서부영화 매니아였던 미국의 저명 과학자가 총은 악당이 먼저 뽑는데 왜 악당이 주로 당
할까, 각본 때문 아닐까 궁금해하다 실험을 해봤더니 실제로 응사속도가 선제발사보다 빠르더란 내용이다. 태극권을 설명하는 갖가지 말 가운데 ‘더디 출발해 일찍 도달한다’는 건 이를 의미한다.
생각이란 요물은 보통 반응을 더디게 한다. 생사가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반응속도가 영점영영 몇초만 늦다는 건 곧 죽음이다. 어차피 이 시리즈는 그런 필살기가 아니라 우리지역 한인들의 심신건강을 위한 기획물인 만큼,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동네축구 경험담이다. 실수하면 큰일나기 때문에 수비에서 밀려나고 체력과 배급능력 등이 미달이어서 미드필드에서도 밀려나 별수없이, 실수를 해봤자 최소한 본전인 포워드나 날개를 맡는 나는 이따금 골을 (넣는 게 아니라) 줍는데, 머리에 맞든 허벅지에 퉁기든 발끝에 스치든 거의 열이면 열 엉겁결에 건드린 게 들어간다. 이상호 백종만 구세홍 신성재 선수 등 정말 공을 잘 차는 동료들이 기막히게 만들어준 챈스에서는 거의 헛발질을 해 애정어린 악살을 먹기 일쑤다. 왜 그럴까. 언젠가 신성재 선수가 정답을 꼭 찍었다. 아무 생각없이 어영부영 차면 들어가고 노려 찬 것은 희한하게 안들어간다니까! 사실, 프로선수들도 그런 측면을 자주 노출한다. 문전프리킥 등 세트피스 말고 움직이는 상태에서 넣는 골은 대개 골이 된 뒤에야 의도가 읽혀지는, ‘생각을 떠난’ 골이 많다. 다만, 프로(또는 유능한 선수)는 같은 상황이 다시 오면 거의 언제나 그 골을 재생산할 수 있지만 동네축구선수는 같은 상황 같은 골 재생산이 거의 언제나 불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엄청난 차이다.
태극권에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도 비슷하게 설명될 수 있다. 상대가 나를 이렇게 공격(하려)한다 저렇게 반격하자 따위 생각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거꾸로 그런 생각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마음까지 내지 않고, ‘생각 이전에 그냥 그대로’ 상태에서 적절히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내공이 쌓여야 고수라고 한다. ‘생각을 떠난 반응’이 ‘생각을 쥐어짠 동작’보다 우위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체감할 수 있는 탈(脫)하수의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뾰족한 첩경은 없다. 반복수련, 오직 그뿐이다. 욕심을 부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래봤자 소용도 없다.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따라할 뿐! 생각이 잠들면 몸은 깨어나리라!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심신건강 위한 위크엔드 특별기획/태극권의 세계는 막을 내립니다. 양생건강운동 일환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양가식 간화24식에 대해서는 도해와 함께 해설을 곁들이려 했으나, 지상해설의 한계점과 곡해가능성 등 때문에 생략했습니다. 이 점 양해말씀 드립니다. 서니베일 태극권대학원 웡치슈 박사님과 SF금문공원 무료 태극권클래스 빌 친 노사님 등 이번 시리즈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한국의 밝은 빛 태극권 박종구 원장님과 진식태극권 대한민국총회 대전지회 서명원 관장님 등이 태극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보급을 위해 사이버 세계에 공개하신 귀중한 자료와 해설, 체험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드리며 이 기회를 빌어 이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태극권 수련에 대해서는 가까운 도장이나 주말 아침에 이뤄지는 SF금문공원 무료 클래스를 노크하십시오. 태극권 전반에 대한 궁금증은 관련책자나 인터넷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시리즈에서 인용된 밝은빛태극권의 홈페이지는 www.hanheart.com, 진식태극권 대한민국총회 홈페이지는 www.tjw.co.kr/new/chenshi-4.html입니다. 영어 한국어 등 각국어로 된 미국인 주도 웹사이트로는 www.worldtaichiday.org 등이 있습니다. 태극권 수련과 학문적 공부(석사과정)를 겸하고 싶으신 분은 서니베일 태극권대학원 홈페이지(www.uewm.edu/programs/CollegeofTaiChi.htm)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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