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극적 상황에서 저토록 평정을 유지하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이번 사고로 조종사가 죄의식을 갖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했지요? 정말 경이로운 자세입니다”
샌디에고 전투기 추락 사고로 온가족을 잃은 윤동윤(37)씨에 대한 한 미국 TV방송 앵커들의 논평이다. 사고 다음날인 9일 윤씨가 애끊는 슬픔을 억누르며 사고현장에 나와 띄엄띄엄 심경을 밝힌 것이 스산한 이 연말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앞의 방송 앵커들은 방송기자가 윤씨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한 후 일부러 모여앉아 그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잃은 비통함, 아내의 산후조리를 도우러 왔다가 참변을 당한 장모에 대한 죄스러움, 가족을 모두 잃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암담함,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대범함을 그는 눈물을 삼키며, 또박또박, 한국남성 특유의 투박함으로 말했고, 그의 그런 태도는 인종을 넘고, 국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가 출석하는 샌디에고 연합감리교회는 그를 돕겠다고 밀려드는 각지의 사랑의 손길들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한다.
8일의 전투기 추락 참사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것은 ‘남의 일’이었다. 우리는 객관적 냉정함으로 무감각했다. 세상은 불완전해서 늘 예기치 못한 사고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이번에도 누군가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불운의 희생자가 되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불운의 주인공이 한인가족인 것을 알게 되고, 결혼생활 4년의 사랑스런 가정이 참혹하게 뿌리 뽑힌 사실을 알았을 때 사고는 더 이상 ‘남의 일’로 남지 않았다. 이승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가장 윤씨의 슬픔의 깊이와 고통의 정도를 헤아려보게 되고, 마침내는 착한 사람들에게 왜 이런 불행이 찾아들까라는 원초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불가에서는 인생을 생로병사의 고해라고 했지만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고통의 요인들도 복잡해졌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주축으로 수많은 고통의 잠재요인들이 잔가지를 치고 있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기차가 철로를 이탈하기도 하고, 경제가 나빠져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정신병자가 휘두르는 총탄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비 오듯 날아드는 화살을 용케도 피하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모든 비극이 고통스럽지만 그중에서도 고통스러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다. 인과응보나 객관적 상황으로 설명되는 불행은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일 수는 있다. 흡연자의 폐암이나 군인의 전사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비극이 있고 누구도 그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보스턴 교외의 유대교 랍비 해롤드 커쉬너 박사가 아들을 추모하며 쓴 책이 있다.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 라는 책으로 80년대에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다.
그는 아들 아론이 3살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들이 희귀병인 조로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가 뭔가 이상하다 생각한 것은 생후 8개월 즈음이었다. 그 때부터 도무지 몸무게가 늘지 않더니 한 살이 되고 부터는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아이가 3피트 이상 크지 못하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쭈글쭈글한 노인의 모습으로 살다가 10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패기만만하던 젊은 랍비에게 그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선하게,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자신에게 왜 그런 비극이 닥친 것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세상의 불공평함에 원망과 분노가 치솟았다.
책은 1977년 아들이 14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들을 돌보고 같이 생활하면서 얻은 비극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세상에는 누구의 탓도 아닌, 이유 없는 비극이 있으며 이때 물어야할 질문은 ‘왜’ 가 아니라 ‘어떻게’라고 그는 말한다. 자책이나 원망으로 고통을 더 하는 대신 비극을 현실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내기가 힘들 때 새 힘을 불어넣어주는 주체, 그래서 기적처럼 비극을 이겨내게 만드는 것이 신이며 신앙이라는 것이다.
경제도 어려운 이 겨울에 수많은 사람들이 윤씨에게 온정을 보내고 있다. 비극의 중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타버린 산야에서 새 싹이 돋듯 사랑의 마음들이 모여 삶은 또 이어진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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