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부모들이 이 글을 꼭 읽어주기 바란다.
얼마전 한 피아니스트(A)가 찾아왔다. 11월말 아주사 퍼시픽대학에서 열린 LA국제 리스트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제공한 자료에는 이 대회에서 다른 한인 피아니스트(B)가 5등을 했다고 쓰여있기에 기사를 쓰면서 그 사실도 언급했다.
기사가 나가고 며칠 후 그 5등 했다는 피아니스트(B)가 전화를 했다. 자기가 리스트 콩쿠르의 ‘부다페스트’ 부문에서 5등 한 것은 맞는데, 또 다른 부문인 ‘협주곡’ 부문에서 1등을 했으며 그 외에도 ‘아메리칸 소사이어티 어워드’를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전체 입상자 명단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기사였기에 다시 B를 위해 리스트 콩쿠르에서 또 다른 한인이 우승했다는 기사를 썼다.
기사가 나간 바로 그 날 잘 아는 음대교수가 전화를 해왔다. 리스트 콩쿠르에 관한 두번의 기사 자료를 어디서 얻었느냐는 것이었다. A와 B의 이야기를 해주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스트 콩쿠르는 35세 미만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대회라 보통 20-30대의 음대 석박사들이 출전하는데 이번에 자신이 가르친 13세 아이가 ‘연습삼아’ 나갔다가 ‘협주곡’ 부문에서 4등을 해서 난리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리스트 콩쿠르 사상 최연소 입상자인 것은 물론 심사위원들이 그 아이에 대해 많은 칭찬과 기대를 보여 사실상 이번 콩쿠르의 ‘스타’는 1등 어른들이라기보다 4등 소년이었다며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더냐?”고 물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상식을 다같이 했다는데, 그 중에서 한인이라고는 달랑 그 몇 명이었다는데, 그걸 서로 전혀 언급도 안 하고 각자 자기 우승한 얘기들만 했던 것이다. 자신들보다 무려 열다섯살 이상 어린 아이가 같은 수준의 실력으로 입상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을까?
그런데 이번 한번 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한다. 두달전 이태리 파가니니 바이올린 경연대회 기사는 이보다 더 기가 찬 경우였다. 한 어머니가 전화를 해왔다. 줄리어드음대에 다니는 아들이 제52회 국제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1등 없는 3등을 했다는 것이다. 파가니니 콩쿠르는 워낙 유명한 대회이기에 기사를 쓰겠다고 사진과 약력을 보내라고 했다.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대회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인터넷에서 역대 파가니니 콩쿠르 입상자 명단을 보게 되었다. 혹시나 하여 2008년 입상자를 클릭했다가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1등이 없는 것은 분명한데, 2등 그러니까 최고 입상자가 한인 여성, 그것도 같은 줄리어드음대 대학원에 다니는 바이얼리니스트였던 것이다. 올해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1등없는 2등과 3등을 미주한인들이 싹쓸이했던 것인데 3등 입상자의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만일 내가 입상자 명단을 보지 않은 채 3등의 기사만 썼더라면 얼마나 망신이었을 것인가.
가끔 콘서트에 가서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피아노나 바이얼린 독주자를 볼 때면 나는 늘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시간과 노력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얼마나 처절하게 악기와 싸우고 자신과 싸우고 고독과 싸우며 실력을 연마했기에 저렇게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존경심 때문이다.
같은 예술이라도 음악은 미술이나 문학과 달라서 어떤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창조력보다는 엄청난 기술적 훈련이 필요한 분야다. 연주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매일 오랜 시간 혼자 연습하고, 무대에서도 혼자 스팟라잇을 받은 채 연주하며, 그 한번의 공연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엄청난 긴장감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 때문인지 연주자들 중에는 무척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많고,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보다 시기심도 강하다는 것이 오랜 세월 문화예술계를 지켜본 기자의 의견이다.
여러 사람과 부딪치고 어울리며 성숙해가는 경험이 부족한 연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늘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하는 부모다. 그런데 내 아이의 입상만 중요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떤 연주자가 될까. 동료의 우승은 숨기고 자기 것만 내놓는 연주자는 어떤 연주를 하게 될까.
음악은 소리에 마음과 영혼을 담아 사람들과 나누는 예술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작품에는 작가의 인품과 영혼이 담긴다. 그런데 함께 나누기는커녕 나만 돋보이려는 일념으로 연주하는 연주자에게서 과연 어떤 음악이 나올지, 진심으로 걱정된다.
정숙희 특집 1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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