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술인을 꿈꾸고 아시아를 꿈꾸던
UCLA 출신 영문학도가
태극권 대학원 학생이 되기까지
백인 노총각 Rolf Truhitte씨의 이야기.
랄프 트러힛(Rolf Truhitte). 새크라멘토 출신의 백인 노총각이다. UCLA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1, 2년 예정하고 떠난 아시아 여행은 13년여 아시아 생활로 바뀐다. 그동안 태극권 등 동양무술과 침술 등 동양의술을 맛본 그는 지금 서니베일에 있는 미국유일 태극권대학원(www.uewm.edu/programs/CollegeofTaiChi.htm) 학생이다.
어려운 명문대 졸업과 기나긴 아시아 체험 뒤에 태극권대학원생이 된 그가 ‘위크엔드 특별기획/태극권의 세계’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사연을 담은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
나는 아시아를 꿈꿨다. 나는 UCLA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나는 직업을 잡기 전에 세계를 보다 많이 보고 보다 많은 인생살이 경험을 갖고 싶었다. 특히 인도구경을 소망했다. 여행사 직원은 내게 말했다. 몇군데 들러보지 그래요? 한곳 들르는 데 25달러만 더 내면 돼요. 대만에서도 시작할 수 있어요.
참 좋은 조언이었다! 나는 1년동안 아시아에서 여행하며 지냈다. 대만,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마침내 인도와 네팔까지 온갖군데 돌아다녔다. 여행이 끝났을 땐 여행비도 바닥났다. 다시 일할 작정을 해야 했다. 대만에서 여행하는 동안 나는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서양인들을 많이 만났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나는 대만에서 내 삶을 더 시험하기로 했다.
나는 한 1년정도, 길어봤자 2년정도만 대만에 머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중국어 구사능력이 좀 생긴 뒤로 나는 태극권과 팔괘장이란 내가권 수련을 시작했다. 또 불교 선사들을 만나 참선지도를 받았다. 내 인생을 바꿔놓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나는 남부 도시 카오슝에서 8년이나 체류하게 됐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2년동안 나는 티벳불교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내가 결국 대만을 떠난 이유는 인도로 돌아가 티벳불교식 3년 묵언수행을 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서양인들에게 처음 허용된 기회였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놀라운 3년이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고향 새크라멘토로 돌아왔다. 3년 묵언수행과 8년 대만체류 등 13년 이상 떠났다가 되돌아온 미국식 생활에 재적응하느라 한참이, 실제로 몇 달이 걸렸으리란 건 짐작이 갈 것이다. 내가 떠난 동안 미국은 많이 변했다. 내 자신은 더 많이 변했다, 미국이 정녕 내 모국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내가 마치 평생을 아시아에서 살았던 것 같았다. 나는 미국과 아시아에서의 두가지 삶을 온전히 조화 내지 통합시킬 수 있으리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아시아로 돌아가 아마도 중국 항저우나 칭타오 같은 도시에서 한참 머물면서 가르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캘리포니아, 특히 북가주를 사랑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10년도 넘게 떨어져 살았으니 다시는 가족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나는 중국전통의학(한의학)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대만에 있는 동안 무술기공과 의술기공을 다 체험했다. 또 본초강목과 경락, 초보적 수준이기는 하지만 침술과 한약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미국에서의 내 직업으로까지 연결시킨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인터넷에서 대체의학 사이트에 난 것들을 보고나서 나는 운명의 손길을 느꼈다.
나는 곧 캘리포니아에 있는 여러 한의대(TCM) 웹사이트를 찾아냈다. 그중 한 대학이 여타 대학들 가운데 단연 돋보였다. 그곳에 미국최초 태극권 석사학위 인증과정을 제공하는 태극권대학원이 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타이밍도 좋았고 행정적 지원도 좋았기에 몇주만에 나는 내가 새크라멘토에서 서니베일에 있는 국제의약대학(UEWM) 대학원으로 쏠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내 삶에 두루 원만함을 가져다줄 것으로 보였다. 다섯 살 때부터 대학 시절 전공을 생물학/의예과에서 영문학으로 바꿀 때까지, 내 꿈은 줄곧 의학분야 커리어로 맞춰져 있었다. 한의학을 공부하면, 그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태극권과 다른 내가권에 대한 경험, 영양학과 약초학에 대한 관심, 각종 명상법 수련, 중국어 실력 등 나의 철학적 예술적 열정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통합돼 진정으로 ‘치료 예술’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풀타임 대학원생이 된 것뿐만 아니라 나는 지금 태극권대학원 사무실에서 그랜드 매스터이자 대학원장인 대니얼 웡(웡치슈) 박사와 일하고 있다. 동양의술 및 동양무술의 마력에 눈을 떠가고 있는 미국에서 이 대학원의 독특한 프로그램이 성장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건 영광이다. 이곳은 내게 감당못할 정도로 좋은 여건이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고수들과의 진귀한 만남이 상당히 자주 있다. 나는 지구를 반바퀴나 돌지 않고도 세계일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데 감사한다. 이에 대해 내 가족들 또한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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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 태극기 태권도
태극사상 혹은 태극철학.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중국여행기나 중국무술 체험기 등에서 심심찮게 이를 뒷받침하는 풍경들이 소개된다. 그런데 중국국기는 공산주의 사상이 담긴 오성기(五星旗)다. 태극사상이 담긴 지구상 유일한 국기는 한국국기, 즉 태극기(太極旗)다. 중국이 태극철학 발원지라고 해서 국기에 그것이 반영돼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태극철학을 받아들인 한국에서는 국기의 이름까지 태극기인데다 ‘태극’이란 명칭을 온갖군데 다 쓰고 있을 정도임을 감안하면 중국의 오성기는 어딘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다. 태극철학이든 태극권이든 화제가 태극에 이르게 되면 중국인 식자들은 한국의 태극기를 거론하며 해동이웃에 각별한 친근감을 표하거나 더러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고 한다. 실은 이 시리즈를 위해 자료제공과 조언, 시연 등 협력을 아끼지 않은 서니베일 소재 미국유일 태극권대학원 원장인 웡치슈 박사도 수차례 태극기를 거론하며 한국(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숙명여대 등지에서의 태극권 특강을 위한 한국여행 경험을 즐겁게 회상하곤 했다.
태극이란 무엇인가. 일반사전에는 궁극의 근원을 뜻하는 동양철학 용어라는 등 무성의에 가까운 짧은 뜻풀이만 돼 있다. 이것만 보고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이 몇이나 될까. 태극이란 용어는 중국고대철학서 역경(易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 역(易)에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으며,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태극기의 태극문양과 그 주변 팔괘가 한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의미가 또렷하게 다가오지는 않더라도, 대강 태극이란 것이 만물생성의 태초의 근원이고 차츰 이렇게 저렇게 가지를 쳐 현상계를 이루는구나, 하는 어렴풋한 감은 잡히게 된다. 태극기의 의미 역시 그 바탕은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다. 여기에다, 한민족 국기인 만큼, 한민족의 역사와 비전을 담았고 흰색 바탕은 백의민족을 의미한다는 등 갖가지 살이 붙여진다.
태극에 대한 약간의 식견만 있다면 따라나오는 것이 음양(陰陽), 나아가 陰陽五行 이론이다. 음양 개념은 어원대로 풀이하면 언덕에 해가 뜨면 음지와 양지가 생기는 데서 비롯됐다. 음지는 어둡고 차갑고 정적이다. 양지는 밝고 따스하고 동적이다. 크고 작고 길고 짧고 강하고 연하고 등 우주만물은 물론 좋고 싫고 등 인간심리까지 모든 것이 음양이론에 맞춰 설명된다. 태극이란 음양이 서로 조화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태극의 조화, 즉 음양의 조화에 따라 권법을 이룬 것이 태극권이다.
그렇다면 태극 이전의 상태는? 무극이다. 한국이 배출한 태극권 권위자 박종구 밝은빛태극권 원장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관계를 씨앗에 빗대어 설명한다. 간추려 정리하면 이렇다. 무극은 책상에 놓인 씨앗이요, 태극은 따뜻한 봄날 땅에 심어진 씨앗이다. 둘은 처한 조건이 다를 뿐 씨앗이란 점에서는 같다. 땅속 씨앗은 큰 나무로 자라날 모든 조건을 갖췄고, 책상위 씨앗은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조건이 갖춰지면 스스로 감응하는데(자라나는데) 이를 일컬어 의(意)가 생겼다고 한다.
의(意)는 동(動)하려는 조짐이 있으되 아직 동하지는 않은 것이다. 노장(老莊)철학 등 중국의 고대철학에서도 무극에서 태극으로 생성발전한다고 정의돼 있다. 둘의 다름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조건만 다르고 근본은 같다는 의미에 방점이 찍힌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즉 무극이 태극이다. 너와 내가, 이것과 저것이 조건(인연)이 달라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뿐, 서로 의존하는 한뿌리요 둘이 아니라 결국 하나라는 불이(不二, Oneness)이론이다. 태극권을 호신술이니 격투기니 하는 차원을 넘어, 또한 건강운동이니 차원도 넘어, 그 자체로 심오한 철학(운동)이자 움직이는 참선이라 일컫는 까닭이다.
놀라운 것은 내가권인 태극권과 달리 외가권인 태권도 또한 태극이론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유급자들이 수련하는 품새명칭부터 태극(1장부터 8장까지)이다. 품새의 각 동작에는 팔괘의 부분부분을 따라 정교하게 태극의 원리가 녹아 있다. 예컨대, 태극 6장은 팔괘의 감(坎)을 뜻하는데 감은 물, 이번 태극권 시리즈 초반에 거듭 설명했듯이 끊임없는 흐름과 유연함이 강조된다.
또 고단자가 수련하는 품새의 명칭 가운데 한수가 있는데, 이 역시 부술 수도 끊을 수도 없는 물의 특성을 기반으로 우주만물 생명의 근원을 표현한다. 태극이론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라는 정의는, 태극권과 태권도가 겉보기에 전혀 다르지만 태극을 매개로 한뿌리 내지 한통속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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