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엄마가 된다면 / 이영아 (오클랜드)
어쩌다 내가 벌써 할머니가 되어 큰아들 집에서 어린손자 둘을 돌봐주고 있었다. 아무 부족함이 없이 할머니와 외할머니 손에서 재롱을 부리며 자라는 손자들과 아이들 걱정 없이 직장에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를 보면 지난날 내가 아기를 갖게 되고 어머니가 된 그때의 기억들이 주마등 같이 밝혀지고 있었다.
희끗 희끗한 머리칼과 주름진 얼굴을 거울에 비쳐보며 뻐근한 허리와 마디마디마다 아프고 잘 펴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내가 벌써 그리고 나의 건강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시어머니인 나와 친정 엄마와의 모든 가르침과 도움을 받으며 임산부 시절이나 산후조리에 한 치의 어려움이나 착오 없이 해낸 며느리가 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너무도 어려운 환경에서 미역국 한 그릇 제대로 끓여 줄 사람이 없는 멀고도 먼 나라 독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며 고생한 나의 지난날이 너무 서러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행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주었고 이미 성인이 된 아들 셋의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지만 오늘을 위해 내가 치른 대가는 너무 가혹했는지도 모르겠다.
열여덟 나이에 고등학교 졸업을 하는 날 천주교 수도회의 주선으로 나는 독일 간호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철없고 순진한 나이에 부모형제도 없는 외국에 나가게 되었으니 아기를 가지면 알아야 할 태교나 산후조리 그리고 육아에 대한 것은 전여 몰랐다. 가르쳐 줄 사람도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일은 나가야겠는데 아기를 돌봐줄 누구도 내 곁에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젊은 나이라 어떻게든 해내었었는데 그때의 고생이 지금의 내 허리와 팔다리, 손마디 마디마다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첫아기는 교회의 종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일요일 새벽에 태어났다. 하느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고 난다는 일요일 새벽에 출생한 아기는 아들이었다. 병원에서 새 생명을 안아 본 나와 남편은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고국에서 사대부 가문에 조선왕조의 후손임을 자랑하며 청렴결백하게 사시는 시부모님이 장손의 출생소식을 받으시면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국제전화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시절이었으니 남편은 편지로 부모님께 손자의 출생 소식을 전하고 좋은 이름으로 작명해 주실 것을 주문하였다.
서양 사람들의 산후조리와 우리 한국인의 산후조리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나는 이제야 알고 있다. 그리고 서양여자와 우리 한국인 산모들의 체질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늦게야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산모에게 얼음물을 마시게 하였고 찬물로 세수를 시켰고 샤워를 하게하였다. 독일병원에서 산모의 밥상에 찰밥과 미역국이 오르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끼니마다 맥주가 한 병씩 따라 나왔다. 빵과 샐러드에 조그마한 고기구이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빵조각은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고 입안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맥주병을 보고 아기가 술에 취하면 어쩌려고 술을 주느냐고 했더니 알코올성분이 거의 없는 이 다거 비어는 산모의 젖이 많이 나오게 도움을 준다고 하였다. 국민복지시설과 제도가 좋은 독일에서 산모는 일주일 정도 병원에서 조리를 한 후 퇴원시켰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고사리 손가락을 펴보기도 하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팔다리를 꼭 잡아보았다. 그런데 아기는 닷새가 지났어도 아직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게 할 자신이 있다며 아기 사진을 찍겠다는 사진사도 끝내는 잠자는 아기 사진을 찍고 말았다. 나는 은근이 걱정이 되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태어난 새 생명이 장님이면 이일을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아직도 눈을 뜨지 않느냐고 묻는 남편의 얼굴에도 근심이 있음을 알았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발 이런 일만은 없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 올렸다.
일주일이 지나고 내일이면 퇴원하여 집으로 가는 날이다. 오늘 새벽에도 너무 걱정이 되어 침대에 앉아 “하느님 제발 저 아이가 장님이 되지 않게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 드렸다. 아침 7시가 되면 아기 젖을 먹이는 시간이다. 간호사가 영아실에 있는 아기를 안고 우리 병실로 오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뻘떡 일어나 앉으며 팔을 벌렸다. 간호사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Mrs. Lee, 아기가 한눈을 뗬어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큰소리로 “정말이야?”하고 물었다. 간호사는 아기가 놀래니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였고 나는 너무 반가워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받아 안았다. 젖을 물리고 오랫동안 아기의 눈에서 내 눈을 띠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젖을 먹이고 있는 동안 아기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두 손가락으로 눈시울을 벌려보아도 눈을 전연 뜨지 않았다.
간호사를 불러 한번 다시 물어보았다. 간호사는 자기가 안고 올 때 눈을 떠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했었다. 배가 고팠던지 팔다리를 동동 굴리며 한참동안 힘차게 젖을 빨고 있던 아기는 젖꼭지를 슬그머니 놓으면서 얼굴을 내 가슴에서 돌렸다. 이제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그 순간 아기는 살그머니 웃는 모습을 지으며 한쪽 눈을 실낱같이 뜨고 보여 주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우리 아기가 눈을 떴어요.“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 저와 장님이 아닌 저 아이에게 축복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며 기도하였다. 가느다란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다 떠도 서양 아이들의 큰 눈과 비교가 안 되는데 일주일이 가도 한 번도 뜨지 않았던 아들의 눈동자를 보며 가슴조인 그때는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아기가 눈을 떠 보여주었고 내일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퇴원하는 날이었다. 아기는 저녁에 젖을 먹고 자러가면서도 눈을 반짝 떠 보여주었다. 나는 아기가 너무 귀엽고 반가워 놓기가 싫었다. 며칠을 계속해 남편이 끓여다 준 미역국이 오늘따라 너무 맛이 좋았다. 밤에는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엔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짐을 챙기며 퇴원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남편은 택시를 불러 올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이 별로 밝지 않아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간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기의 황달증세가 좀 심하니 아기는 병원에 두고 나만 퇴원하라고 하였다. 이게 또 무슨 청천벽력이냐 싶었다. 황달증세는 유아들에게 많이 오는 것이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간호사는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아기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고 울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병원으로 아기를 데려오기로 하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 아기와 함께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기는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노랗게 되어있었다. 목욕을 시키고 젖을 먹인 후 다시 병원으로 데리고 갔었다. 고사리 손목 같은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자 아기는 소스라치게 울었다. 불과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나의 아기가 주사바늘의 아픔에 우는 것을 보고 나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남편은 학교에 갔었고 나의 손을 잡아줄 그 아무도 내 곁에는 없었다. 매일 피검사를 하면서 관찰을 해야 하겠으니 아기를 병원에 두고 가야한다고 의사는 말했었다. 아기를 병원에 두고 전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나의 마음은 엄마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묻고 있었다.
아기의 황달증세는 삼사일 후 치료되었고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 때의 그 아이가 지금은 내 손자의 아빠가 되었고 나는 그 손자들을 돌봐주며 지난 날 내가 엄마 되었던 시절을 돌아보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을 가져본 엄마의 행복은 끝이 없지만 키울 때의 어려움이나 산후조리 하나 제대로 못해 굽어진 손가락이나 아픈 허리를 쓰다듬으며 그 옛날 기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추억은 쓰나다나 아름답다고 하였지.
집에서 두어 달 동안 일을 나가지 않고 아기와 함께 쉴 때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미역국 한 그릇 끓여줄 사람도 아기 기저귀를 한번 갈아줄 사람도 내 곁에는 없었다. 그나마 남편의 사랑이 있었기에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누구에게 어떻게 아기를 맡기고 다시 일을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양쪽 부모형제나 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이곳에 없다. 남편은 학교에 나가야한다. 탁아소도 별로 없지만 우리들의 수입으로 그곳에 아기를 맡길 수도 없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는데 옆집에 혼자 사는 독일할머니가 아기를 한번 보고 싶다며 들렸다.
우리 아기는 이사람 저사람 손을 거치며 아무렇게나 자랐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옆집 할머니가 친손자처럼 잘 돌봐주었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우리 아기는 또 다른 손을 빌려야 했었다. 건너편에 사는 같은 성당 교우부인의 도움으로 또 몇 개월을 넘겼다. 그것도 잠간이었고 드디어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별이 총총한 새벽에 깨워 유모차에 태우고 전차를 타고 병원 일을 나가야 했었다. 병원 간호사 사무실 구석에 아기를 잠재워 두고 환자를 돌보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집에 돌아와 아기와 함께 하루저녁을 보내는 나는 새벽이 오는 것이 두려웠었다.
산후조리는커녕 힘든 일과 아기 걱정에 싸인 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동료간호사들의 도움과 수간호사의 허락으로 나는 아기를 병원에 대려다 두고 일 할 수 있었던 그때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리고 친정어머니 같이 아기를 돌봐준 옆집 할머니에게 지금도 그 고마운 마음 잊지 않고 감사드리고 있다.
목욕탕도 없는 추운 방에서 물을 데워 아기를 목욕시키고 천으로 된 기저귀를 빨아서 사용하였다. 남이 쓰다버린 유모차와 장난감도 고맙게 주어다 사용하였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탁아소 시설이 있는 병원으로 직장을 옮기고 첫돌을 막 지난 아기를 탁아소에 맡기고 일을 나갔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우리 아기는 탁아소 문을 잡고 울고 있었고 내가 돌아올 무렵에도 문 앞에 서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는 아기를 보며 병동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탁아소에서는 홍역을 앓는 아이들을 격리 시키고 조금 낳은 식사를 제공하였다. 고기와 계란이 함께 나온 점심을 보고 그것이 먹고 싶어 우리아기는 홍역을 앓는 아이들 방에 들어가 삶은 계란을 얻어먹고 같이 놀다 그만 홍역에 전염되고만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낮잠을 자고 깨어난 손자의 우는 소리에 내가 아기를 키운 기억들을 멈추고 이층 아기방에 올라가 보았다. 젖은 기저귀를 갈아주니 시원한 기분에 또 오줌을 싸버린다. 그 옛날 우리 큰 아들이 건강진단을 받으러 가면 의사 앞에서 오줌을 누어 나를 민망하게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를 닮아 너도 기저귀만 벗기면 또 오줌을 싸는구나 하면서 웃었다. 지나간 날들이 추억으로 자리 잡았지만 아픈 허리와 똑 바로 펴지지 않는 손마디를 바로 고치기는 너무 늦었나 보다. 그리고 너무 고생을 시키며 키운 오늘의 큰아들을 보면 마냥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다. 지난날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도 없지만 오늘도 아픈 손마디를 만지면서 그때 못해준 사랑과 정성을 내 아들에게 더 많이 쏟고 싶어진다. 착한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내가 함께하는 손자들과 보내는 시간은 그저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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