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가장의 겉모습
자식 향한 애정 똑같아
한번은 체중이 3주 사이에 60파운드가 빠진 적이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금방 차를 타고 다니는 미국생활과 달리, 해뜨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분주히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강행군을 하는 선교지 생활에서 얻은 수확이었다.
의도적으로 체중감량을 위해 한 것도 아니고 한 여름 삼주 동안 냉방시설도 없는 곳에서 오직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더위를 이기고, 미국에서처럼 캔디나 초컬릿 같은 정크푸드도 없이, 또 해만 지면 완전히 깜깜해지는 곳에서 밤늦게까지 잠 안 자고 있을 일이 없었다. 따라서 공연히 밤늦게 라면 끓여먹는 일도 없어서 얻어진 귀한 열매였다. 안타깝게도 중간에 한국에 들러 누이네서 5일 있는 동안 그중 20파운드는 너무나도 쉽게 금방 다시 돌려받았고, 또 그 나머지는 미국에 돌아와서 한 달 안에 서서히 다 돌려받았지만 잠시나마 쌀 몇 포를 내려놓은 것 같은 가벼움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아마 권투선수들이 시합에 임하는 ‘파이팅웨이트’를 체험해 본 것 같다.
갑자기 몸무게 얘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보스턴에 있는 넷째 아이한테서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랑 한참 얘기를 하다가 아빠한테 할 말이 있다고 전화를 바꿔 줘서 받았는데,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갑자기 용건으로 들어가서 하는 말이 요즘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것이란다.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꼼짝없이 큰 심부름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냉정하게 답하기를, “오 그래, 우리 아들, 소화가 안 될 때 제일 좋은 처방을 얘기해 줄까? 아빠는 소화가 잘 안되면 금식을 한단다. 심하지 않을 때는 한 끼 정도면 되지만 심한 경우에는 하루 온종일 금식을 하면 금방 뚫어놓은 하수구 같이 뻥 뚫리지. 한번 시험해 보렴”이라고.
애들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조금 측은하다.
어느 농담을 들어 보니까 한 엄마는 첫째 아이 때에는 애가 기침을 하거나 콧물만 조금 흘려도 금방 구급차라도 부를 긴박감으로 안절부절 못했지만, 다섯째 아이 때는 애가 놀다가 경대 위에 있는 동전을 삼켰다고 엄마한테 달려오니까 “너, 그것 용돈에서 제할 거야!”하고 소리 질렀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이다.
큰 딸이 대학 기숙사에 있을 때에는 가끔 가다가 햇반에 김에 깻잎통조림 진공팩 두부 등 공부하다가 출출하면 먹으라고 큰상자로 하나씩 가득 채워서 부쳐 주었는데, 이제는 넷째이다 보니까 한참 날씨가 싸늘해지고 숙제다 프로젝트다 밤새기 할 일만 쌓여가는데, 무심한 아빠는 이런 사정을 전혀 다 까먹고 텅 빈집에서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만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가까이 있는 다섯째 애가 집에 들렀을 때 인터넷 장거리 전화 스카이프(Skype)도 설치해 주고 인터넷 채팅도 가르쳐주고 해서 심심하면 각지에 흩어진 애들과 대화를 즐기는 것을 본다. 옆에서 대강 듣고 있으면, “오, 그랬어! 얼마나 힘드니.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가끔 나가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해. 엄마가 내일 네 구좌에 돈 좀 넣어 줄께”라던가 “오늘 거기 일기를 보니까 벌써 영하로 내려갔더구나. 그래서 엄마가 목도리랑 조끼 보내 줬으니까, 나갈 때는 꼭 따듯하게 입고 다녀, 알았지” 등이다.
그리고 전화나 채팅이 끝나려면 적어도 몇 번씩, “사랑해, OO야!”(I love you, OO)를 반복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애들을 상전 모시듯이 애지중지 하는지 어떤 때는 아빠인 내가 샘이 날 정도다.
그런데 오늘은 아빠한테도 차례가 온 것은 작년까지만 해도 가끔 보내주던 소포 때문이다.
엄마는 잔정은 있어도 한 상자에 20파운드씩 하는 먹을거리를 몇 개씩 보내주는 것은 아직은 아빠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로 엄마한테 하는 말이 요즘은 너무 할 일이 많아 매일 밤을 깔딱깔딱 새우기 일쑤인데 어제는 하도 배가 고파서 기숙사애들과 합작으로 근처 중국집에서 무엇인가 배달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요기는 껐지만 따끈따끈한 쌀밥과 그 위에 얹어 먹는 한국음식만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동안 깜빡했구나. 곧 한 상자 담아서 보내주어야겠구나”하고 자중을 했지만 그러나 하도 엄마가 달콤한 말만 해주니까 아빠는 오히려 무뚝뚝하게만 대한 것이다.
그래서 소화불량에는 금식이 특약이라고 말하고 좀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든지, 숙제는 미리해서 너무 밤늦게 있는 일을 없애라고 해서 소포 얘기를 못 꺼내게 한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공부하면 꼭 밤늦게까지 앉아 있을 일이 없어질 것 아니냐라고 하고, 기숙사에서 나오는 음식도 너무나 좋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왜 밤늦게 바깥에서 음식시켜 먹느냐고, 절대로 용납 못할 일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만 것이다.
끝까지 엉뚱한 얘기만 했더니 드디어 “아빠, 알았어요. 나 수업가야 돼요. 아빠 사랑해요!” 하고 전화를 끊는다.
흔히들 자녀 교육에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과 아빠의 엄한 사랑이 다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는 누가 정한 것이 아니고 엄마는 극히 자연스럽게 따뜻하기만 한데 아빠의 경우는 대수롭지 않은 격려의 말(small talk)보다는 무뚝뚝하고 엄한 말만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실 만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지만 또 동시에 우리의 죗값으로 꼭 그를 대신해서라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던 만치 공의로우신 것이다.
오늘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을 내서 이것저것 사서 한 상자 정도는 보내주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넷째라도 벌써 20년 가까이 내 아들이다가 보니까 아빠가 그렇게 말이 길었던 것을 보면 조만간 곧 구호물자(care package)가 도착할 것을 감지했을 터이니까 말이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213)210-3466, johnsgwh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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