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험을 못 본 친구에게 작은 격려의 쪽지가 몰래 도착하고, 좋은 일이 있는 친구의 책상 위에 꽃 한 송이가 올라와 있고, 배고픔의 강렬한 욕구를 가진 친구에게 반으로 나눈 빵이 전해지는 등 교실에서는 따뜻한 감정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가 쓴 교육칼럼에서 읽은 구절이다. 담임교사였던 그는 학기 초 서먹한 교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마니또 게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착 가라앉았던 교실에 활기가 돌고 냉랭하던 급우들 사이에 봄 아지랑이 같은 따스한 기운이 솟아나더라는 것이다.
우리 같은 중년층은 경험해보지 못한 게임이 한국에 있는 모양이다. 그 교사의 설명에 의하면 ‘마니또’란 ‘비밀친구’라는 뜻. 제비뽑기로 각자 대상을 정한 후 상대방이 모르게 도움을 주는 게임이라고 한다.
게임을 위해서 학생들은 자기가 제비뽑은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을 것이다. 그러다가 친구가 배고픈 것 같으면 먹을 걸 챙겨주고, 울적해 보이면 기분을 전환시킬 이메일이나 카드를 보내주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선물을 슬쩍 갖다 놓으며 말 그대로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것이다. 서로서로 상대방을 보살피느라 쏟은 관심, 보살핌을 받으면서 얻은 행복감 … 이런저런 따뜻한 감정들이 얽히고설켜서 교실 전체는 그 자체로 훈훈한 감동의 난로가 되었을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온기가 그립듯이 우리 삶의 풍경이 스산하니 따스함이 그리워진다. 연일 추운 뉴스들을 듣다가 문득 ‘마니또 게임’ 이야기가 생각났다.
11월 한달 미국에서 53만 여명이 또 일자리를 잃으면서 실업률이 6.7%에 달했다. 한달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 것은 34년 만에 처음, 실업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15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춥고 또 추운 나날이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하는 말이 딱 두가지이다. “요즘 정말 힘들어요” 아니면 “요즘 정말 힘든 사람 많아요” - 후자는 형편이 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나의 불안이 너에게 전염되고 너의 불안이 나의 불안을 증폭시키면서 사회전반의 정서적 체감온도는 영하로 내려갔다.
불경기라는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저마다 꽁꽁 얼어붙은 채 적막하게 보내야 하는가. “겨울 산이 적막한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새 소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법정 스님의 관찰은 되새겨볼 만하다. 추위 때문에 사라진 새들이 돌아와 지지배배 노래를 한다면 겨울 산도 그다지 적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우리 삶의 풍경이 적막한 것은 경기 한파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마음들이 꽁꽁 얼어붙은 때문이다. 관심, 배려, 친절 같은 훈훈한 마음들이 되살아난다면 불경기라고 해서 춥지만은 않을 것이다.
행복감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하버드 의과대학과 UC 샌디에고가 공동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행복감은 쉽게 옆 사람에게 번져서,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느끼는 행복감이 몇 다리를 건너 내게까지 전달된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그가 속한 사회적 연결망을 타고 속속 번져서 나중에는 모두가 그 행복감의 덕을 본다는 것이다. ‘마니또 게임’을 했던 학급 친구들의 행복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비슷한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친절의 게릴라 운동이 있다. 전혀 상관없는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친절을 베풀어 행복한 놀람을 안겨주자는 운동이다. 생각지 못한 친절을 받고 나면 행복한 기분에 그 사람 역시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렇게 친절이 친절을 낳기를 계속하다 보면 온 사회가 푸근해지리라는 기대이다.
얼어붙은 주택시장, 사라져가는 일자리는 우리 권한 밖의 일이다. 각자의 형편대로 묵묵히 견뎌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 곁의 가장 힘든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힘은 우리에게 있다. ‘마니또’나 ‘친절의 게릴라’가 되어보는 것이다. 적막한 ‘겨울 산’이 견딜만해질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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