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맥관통 센트럴 퍼시픽 난공사
중국인 노무자들 힘으로 해내
서쪽에서 부설을 시작한 센트럴 퍼시픽은 새크라멘토 분지(Sacramento Valley)에서는 공사를 순조로이 잘 진행했으나 시에라 네바다 산맥 기슭에 다다르자 앞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미국에서도 가장 표고가 높은“위트니산 (Mount Whitney-표고 14,505 피트)”을 끼고 있는 험준한 산맥이다. 한 가닥의 마차 길도 없었고, 사람의 발자국조차 찾기 어려웠던 처녀림(處女林)이었다.
오늘날 포장이 잘된 시에라네바다산맥을 횡단하는 고속도로를 타고 새크라멘토에서 레이크타호나 리노에 가노라면 경험하게 되지만, 지형이 험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산중에 수목이 우거진 상태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몇 아름씩이나 되는 고목이 빈틈없이 서 있는데, 이러한 나무를 벌목을 해서 처리하는 일만도 대단하였다는 것이다.
공사를 시작할 때는 노무자들 대부분이 아일랜드나 독일계 이민 노무자들이었으나 저임금에 일은 호되어 슬금슬금 일터를 이탈하는 자가 많았다. 이 사람들의 대부분은 네바다주에 은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철도 공부로 일을 하면서, 은광 지역까지 가서는 철도 일을 박차고 은광에 매달릴 작정으로 취직을 한 사람이었다.
꿩 먹고 알 먹을 작정이었으나 은광 지역에 다다를 때까지 버티어 낼 재주가 없어서 손을 들기 시작을 한 것이다.
노동력동원의 위기에 봉착한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에서는 중국인들의 고용을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체구가 작아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고, 인내력도 없을 것 같아서 사내에서 반대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인사책임을 지고 있던 찰스 크로카(Charles Crocker)는 대안을 찾을 길이 없자 일단 용단을 내렸다. 그는“황금 붐”때 금광판에 모여들어 캘리포니아주 각지에 산재해 있던 중국인들을 모집, 일을 시켜 보았는데 지금까지 취업했던 어떠한 철도 공부들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임금도 낮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크로카는 화급히 캘리포니아 각지에서 중국인들을 증모했지만 절대수의 부족으로 결국 중국본토에서 직접“꾸리(육체노동 잡부)”를 모집하여 현장에 투입하기로 하였다.
그의 이 용단은 센트럴 퍼시픽사의 성공적인 시공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으로써 사내에서“크로카”의 입지를 더욱 더 견고하게 하였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중국인 철도 공부(工夫)의 별명을 ”Crocker’s Pet”이라고 하였다. Pet이라는 말은 원래 “애완동물”이라는 말인데, 경멸적 용법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해서 “크로카”가 아니면 그와 같이 험한 일을 해낼 인부를 찾아 낼 수가 없었을 것이이라는 뜻에서, 그들을 “중국인”이라고 부르는 것 보다는 “크로카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센트럴 퍼시픽 구간은 전적으로 중국노무자들에 의해서 시공이 되었는데, 한참 피크 때는 11,000명이나 동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백인들은 전체 노무자의 10%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건설 노무자들의 일급(日給)은 1인당 평균 $3.00이었는데 중국인 노무자들은 그 금액의 1/3정도였다.
미국 초기의 13개 식민지가 동부 해안지역에 밀집해 있었던 이유는, 동부지역의 남북을 세로 지르는 아팔래치안 산맥 때문이었다. 산이 험준해서 그 당시의 기술로는 서진(西進)하는 도로를 만들 수가 없었다. 다음의 난관은 미시시피강이었다. 강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중부의 대평원이 문제였지만 럭키 산맥과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더 이상의 진척을 허락치 안았다. 험준한 높은 산이 첩첩이 겹쳐 서있는 광경을 보고는 누구도 감히 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도보로 넘는다고 해도 그곳에 철도를 부설하는 일은 상상조차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런데 동부에서 철도기사로 다년간 철도설계와 시공을 한 경력이 있고 캘리포니아의 단거리 지방철도를 부설한 경험이 잇는 시어도어 주다(Theodore Judah)라는 기사가 면밀한 답사 끝에 산맥을 관통하는 철도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공을 위한 실무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일단 시공의 가능성은 입증이 되었으나 실제로 그 난관을 돌파하는 데에는 한없이 많은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우선 시공에 따르는 인명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생했는데, 당시 그 상황을 “철도의 친목(tie-궤도 아래에 철로와 직각이 되게 총총히 까는 통나무)하나 하나 아래에는 중국인 희생자가 깔려있다”라고 표현했다.
회사측에서는 공사의 공기(工期)를 단축하기 위해서 발명된지 얼마 안 되는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였는데, 제품의 결함과 기술부족으로 폭파 작업을 할 때마다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특히 터널작업을 할 때의 폭파작업에서는 폭약의 위력을 잘 모르는 공사 감독들의 불찰로 작업 중이던 공부가 터널 속에 생매장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화약의 심지성능이 좋지 안아서 원격 폭발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화약에 박혀있는 심지에 직접 점화를 하여야 했다. 화약에 점화를 한 공부는 순간적으로 그 지점에서 벗어나야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는데, 특별히 훈련 된 솜씨가 아니면 불가능한 묘기였다. 그래서 임기응변 책으로, 점화를 하는 광부는 뒤에서 잡아 당기면 움직일 수 있도록 밧줄을 잡아맨 바구니 속에 들어가서 점화를 하고, 뒤에서 그 밧줄을 재빨리 잡아당겨 점화 지점을 벗어나게 했다. 상상만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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