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올해 1,500만달러에서 내년 200만달러로
브레이브스 떠나 왕년추억 서린 애스트로스로
왼손투수 마이크 햄튼은 대학을 건너뛰고 마이너리그에 잠깐 있다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 1993년, 그의 나이 만 스물살 때다. 첫 둥지는 시애틀 매리너스였다. 1972년 9월9일 플로리다주 브룩스빌 출신인 그로서는 미국의 동남부 끝에서 서북부 끝으로 대각선 이동을 한 셈이었다.
그의 메이저리그 마운드 데뷔시즌은 혹독했다. 선발투수로 3번, 불펜투수로 10번 출격해 17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칭작황이 형편없었다. 17이닝동안 안타 28개(그중 홈런 3개)에다 볼넷 17개를 내주고 도합 20실점(그중 자책점 18점)했다. 삼진은 8개를 낚았다. 그래서 1승3패 1세이브 2홀드에 방어율 9.53.
매리너스는 더이상 햄튼을 실험하지 않았다. 그해 스토브시즌에 햄튼은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옮겼다. 1994년 햄튼은 1993년 햄튼이 아니었다. 그를 버린 매리너스가 배아플 정도로 잘했다. 불펜투수로 44게임에서 41.1이닝을 소화하며 2승1패 10홀드를 기록하며 방어율 3.70을 남겼다. 1995년, 애스트로스는 햄튼을 선발투수로 승격시켰다. 햄튼은 애스트로스의 기대에부응했다. 24게임 모두 선발로 출장해 150.2이닝동안 마운드에 섰다. 9승8패에 방어율 3.35. 선발전업 첫해 성적으론 풍작이었다. 1996년, 햄튼은 10승(10승) 고지에 올라섰다. 방어율(3.35)은 더욱 낮아졌다. 1997년 15승10패(방어율 3.83)으로 일약 스타투수 대열에 들어선 햄튼은 1998년(11승7패, 방어율 3.36) 약간 주춤했으나 1999년 가공할 위력을 선보였다. 총 34게임에서 239이닝동안 던지며 22승4패를 기록했다. 방어율(2.90)도 퀄러티 투수의 기준선인 3.00을 밑돌았다. 방어율은 낮을수록 좋다.
햄튼의 괴력피칭은 상대팀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문제는 그것이 애스트로스에게도 성가신 고민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잘 던지는 건 좋지만 계약이 끝나가는 그의 맹활약은 곧 뭉칫돈 재계약의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애스트로스는 그를 내보냈다. 햄튼의 다음 정처는 뉴욕 메츠였다. 2000년, 햄튼은 1999년만큼은 아니어도 괜찮은 성적(15승10패)을 남기고 자유계약선수(FA)가 됐다. 햄튼의 행선지는 그해 스토브시즌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월척 햄튼을 낚아올린 건 뜻밖에도 콜로라도 로키스였다. 뜻밖이란 이유는 대략 두가지다. 하나는 로키스가 중하위권 팀이라 선수들이 그리 선호하는 팀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또하나는 로키스의 홈구장이 투수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쿠어스 필드라는 것이다. 햄튼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로키스가 내민 장기+거액 계약서(8년 1억2,100만달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넘치는 자신감에 그가 속으로 투수들의 무덤에서 보란 듯이 성공피칭을 해보자고 결기를 다졌는지도 모른다.
해발 1마일 높이 로키산맥 중턱에 자리잡은 콜로라도 덴버의 쿠어스 필드는 역시 투수들의 무덤이었다. 평지구장보다 기압이 낮아 공에 힘이 실리지 않고 툭 갖다대기만 해도 안타가 되고 홈런이 되기 일쑤니 천하의 햄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로키스에서의 첫해(2001년) 기록은 14승13패. 2000년과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방어율(5.41)이 훨 나빠졌다. 2002년에는 더욱 죽을 쒔다. 7승15패에 6.15. 로키스는 본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햄튼은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합의이혼.
햄튼은 평지팀(애틀랜타 브레이브스)으로 내려갔다. 성적은 올라갔다. 2003년 14승8패(3.84), 2004년 13승9패(4.28). 그러나 햄튼에게 더 큰 액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상. 그것은 부진을 낳았다. 부진은 다시 자신감을 갉아먹었다. 잔여기간 계약액을 떠안기로 하고 햄튼을 사들인 브레이브스에게도 액운이었다. 2005년에 햄튼이 출격한 것은 고작 12차례밖에 안됐다. 성적은 5승3패(3.51). 부상으로 아예 마운드 나들이를 하지 못한 2006년과 2007년에 비하면 그나마 풍작이었다. 연봉은 1,000만달러를 넘는데 승리사냥은 고사하고 부상치레까지 해야 하는 브레이브스로서는 그를 하루속히 방출하고 싶었겠지만 거덜난 햄튼을 받아주겠다는 팀은 없었다. 오라는 곳이 없는데 공연히 제발로 집을 나설 햄튼 또한 아니었다. 2008년 중반기에야 햄튼은 마운드에 다시 섰다. 13게임에 나섰다. 3번 이기고 4번 졌다. 방어율은 4.85. 무려 1,500만달러 몸값에 비하면 형편없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이전 두해동안 통째로 공치면서 부활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평을 듣던 터라 3승이 13승처럼 보일 정도였다. 특히 후반기 막판에 몇차례 왕년의 햄튼다운 피칭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정규시즌 뒤, 햄튼은 8년만에 FA가 됐다. 나이는 어느덧 서른 여섯. 정상적 성장곡선을 그려왔다면 그는 이번 스토브 시즌에서 마흔 너머 은퇴까지 내다보고 장기계약을 노렸을 것이다. 올해 연봉만 기준으로 해도 6,7년 1억달러 안팎의 초대형 계약서에 사인하고 요란한 카메라 플래시 속에 새 구단 입단회견을 열었을 것이다. 꿈이 됐다. 그는 3일 좋았던 그 시절의 추억이 서린 애스트로스와 재결합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조건은 1년에 200만달러. 성적에 따라 200만달러까지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붙었다. 구단은 햄튼의 흉작성적을 근거로 몸값을 후려쳤고, 햄튼의 내구성을 못믿어 기간을 최소단위로 잘랐다. 성지난 4년의 초라한 흔적 때문에 햄튼은 그나마 감지덕지 받아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내가 가장 즐거웠던 추억의 대부분은 휴스턴 애스트로스 유니폼을 입었을 때 나왔다. 영광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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