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기’가 두려워 나를 찾으니
’죽을 나’가 본래 없음을 알았네
개념이전 그냥 그대로니 돈망천국이요
온세상 범사에 감사하니 지족천국이네
거진 2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밤 9시 고개를 막 넘어 더 깊은 밤으로 향했다. 좁은 선방을 채운 감사합장과 박수소리가 잦아드는 결에 어느 보살이 스님 앞 상 위에 접시를 올렸다. 떡 몇입 과일 몇조각 과자 몇줌이 담겼다. 야참공양. 서른 남짓 불자들은 한쪽으로 개미처럼 늘어서 부지런히 주방을 드나들었다. 정작 스님은 바로 앞 공양접시에 손은커녕 눈을 둘 겨를이 별반 없었다. 바싹 다가앉은 노보살, 그 뒤에 붙어앉은 또다른 보살, 맞은편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거사. 노보살을 향해 스님은 처음에는 귀를 열고, 곧 얼굴을 돌리더니 이내 몸을 틀어 마주보고는 손을 내짚어 반무릎을 꿇은 상태로 골똘히 듣고 조근조근 얘기했다. 대화는 귀에 아련했다. 청하는 보살보다 설하는 스님의 더 낮은 자세는 눈에 또렷했다.
저토록 낮추기에 그토록 높아보이는 것일까. 근 2시간 법문에서도, 얼기설기 공양 뒤 이어진 대략 30분 문답에서도 스님의 낮은 자세는 잔잔하고 따사로운 배경음이 됐다. 간화선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스님은 간화선이란… 하고 단박에 주입하거나 훈도하지 않고 그건 우리 유인 거사한테…라는 식으로 추어주면서 당신의 생각을 우스매에 버무려 엮어냈다. 화제가 염불선, 특히 보리방편문에 꽂혔을 땐 스님은 그건 저기 우리 최규현 박사님한테… 체험담을 직접 꺼내 두루 나누도록 이끌었다. 스님은 스스로 불이 되어 온갖군데 밝히려드느니 차라리 불쏘시개가 되어 불자들 가슴에 불심을 콕콕 활활 지펴주려는 것이었을까. 암튼 스님의 방식은 곧장 효험을 봤다. 유인 거사는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몸둘 바를 몰라하며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최 박사는 보리방편문을 염송하면서 몸소 느낀 바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기꺼운 기색이 역력하게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이들의 몸짓과 말을 통해 스님의 뜻을 새겨들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하나, 스님은 군데군데 불쏘시개 역할을 하면서도 이 불은 내가 지폈으니 나를 따르라는 식의 강요나 고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같이 웃고 함께 끄덕인 뒤 그 다음 얘깃고개로 터벅터벅 넘어갔다.
11월 28일(금) 밤 북가주 참선모임 수선회 선방(산호세)에서 청화 큰스님 맏상좌로 삼보사 주지를 지낸 용타 스님 초청 법회가 있었다. 법회라기보다 사랑방 만남이었다. 다른 일로 이곳저곳 둘러보기 위해 북가주에 온 스님을 수선회측이 금요참선 시간에 모시는 형식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따로 광고를 할 겨를이 째이고 스님도 거창하게 법회다 뭐다 하는 것을 원치 않아 수선회측이 회원들과 몇몇 지인들에게 전자우편을 통해 모임을 알리고 신문에 토막소식으로 안내됐을 뿐이었지만 추수감사절 연휴기간인 금요일 밤에 서른명 남짓한 불자들이 모였다. 늘 고즈넉한 선방이 모처럼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찼다.
아깝게 되야부렀구마.
스님이 풀어놓은 말씀보따리 첫 뭉치의 끝자락은 이랬다. 84세 노모가 스님이 된 아들의 말을 한참 듣고나서 했다는, 남도 사투리에 실린 모정의 표현이었다. 스님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그보다 먼저 강진땅 모자는 왜 그런 새삼스런 자리가 필요했을까. 갯벌에서 고막이나 소라 아니면 장둥어 따위를 잡아 5일장에 내다팔거나 뼈 노그라지게 땅을 부쳐야 삼시 세끼 겨우 밥을 먹는 농어촌 마을 아낙네 치고 허리띠 졸라매고 대학문턱 너머로 들여보낸 아들이 양복 입고 펜대 잡고 남보란 듯 효도하기는커녕 빈털터리 스님의 길로 접어든 걸(스님은 전남대 철학과 재학중 출가) 반길 이 누가 있겠는가. 스님 아들은 보통 어머니의 서운한 마음을 쓰다듬어야 했을 게다. 이 좋은 부처님 세계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은혜로운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한다는 소명의식도 있었을 게다. 푸르른 빛이 감돌 정도인 아들의 박박머리를 바라보며 더욱 서러웠을 어머니 앞에서 스님이 올린 얘기는 6조 혜능 대사에 얽힌 것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5조 홍인 대사 문하에는 제자들이 수백명이었다. 으뜸은 신수였다. 혜능이 물어물어 그곳을 찾았다. 글자도 모르는 (것으로 알려진) 남쪽지방 더벅머리 촌뜨기가 할 일이란 방아찧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덟달. 홍인 대사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게송을 지어 올리도록 했다. 후계자 뽑기 절차였다. 신수가 있는데 누가 감히, 다들 포기했다. 신수는 게송을 올렸다.
여기에 불성이 있는데 때가 가리고 있으니 때를 벗겨내면 불성이 드러나리라.
선불교 이전 상식적인 올드버전 아닌가. 홍인 대사는 갑갑했다. 하지만 막무가내 야단치기 뭐했던지 한마디 품평했다. 이 게송대로 살면 지옥에는 안떨어지겠다. 멋모르는 이들은 홍인 대사가 신수를 인정한 것으로 오해했다. 소문은 방앗간에도 닿았다. 혜능도 갑갑했다. 글을 모른 (행세를 한) 그는 주변사람에게 받아적게 해 게송을 올렸다.
본래 청정이어서 쓸고 닦을 것이 없다.
홍인 대사는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낌새가 이상했는데 더벅머리 촌놈이 일을 냈구나. (혜능은 홍인 대사를 처음 만나 도를 깨우치러 왔다고 했다가 남쪽 촌놈이 도는 무슨 도냐는 의도적 핀잔을 듣자, 사람에는 남북이 있으되 도에도 남북이 있습니까, 라고 되받았다고 한다.) 놀라움은 반가움의 다른 말이었다. 홍인 대사는 밤중에 혜능을 불렀다. 의발을 건네주었다. 법은 혜능에게 대물림됐다. 홍인 대사는 혜능에게 그 길로 도망치도록 했다. 다른 제자들이 머슴의 법통인수를 인정하지 않고 무슨 일을 낼까 염려에서였다. 이튿날, 홍인 대사는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신수 대사는 의발을 받지 못했다. 머슴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놈이다. 제자들은 혜능을 죽자사자 뒤쫓았다. 혜명, 날쌔고 힘센 이 추격자에게 혜능은 끝내 잡혔다.
이것 가지러 오셨소? 가지고 가시오!
도리어 혜명이 놀랐다. 전법의 징표를 저토록 스스럼없이 내놓다니…. 혜명은 천재일우의 기회앞에 잠시 갈등했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나에게는 의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이 중요하오. 법을 알려주시오. 혜능은 물음으로 답했다.
不思善 不思惡…是明上座 本來面目(불사선 불사악…시명상좌 본래면목/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고…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추격자 혜명은 그 자리서 아하 깨달음을 얻고 ‘어렵사리 생포한 포로’의 제자가 됐다. 그래도 긴가민가할 이들에게 용타 스님은 상 위의 물건들을 빗대어 보충설명을 이었다. 컵, 그러면 컵과 컵 아닌 것으로 갈라지죠, 매직, 그러면 매직과 매직 아닌 것으로 갈라지죠. 남자, 그러면 남과 여로 갈라지고, 남쪽, 그러면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게 되고…무엇이다 하면, 한생각 떠올렸다 하면 둘로, 이분법적으로 딱 나눠집니다. 개념놀음을 하는 그 이전에 체험되어지는 내 마음이 본래면목입니다…
그러면 아깝게 되야부렀구마는 무슨 뜻이었을까. 스님은 어머니의 심중을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다만, 덧붙였다. 나는 실망 조금도 안했어요…너무 기뻤던 거에요, (드디어) 느그 어머니께 얘기를 (해드렸구나)… 스님은 이어 대학원 시절 선(禪)에 관한 석사논문을 정(定)의 관점으로 잘못 쓴 과거를 스스로 들춰낸 뒤 혜(慧)에 각별한 방점을 찍어 뒷얘기를 풀었다.
죽는 것만 빼고 고행이란 고행은 다 해보고(고행주의/戒)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더없이 고요한 마음에 접근해봤는데(선정주의/定), 부처님은 무엇이 안돼서 무엇을 더 얻겠다고 보리수 아래서 최후의 몸부림을 쳤을까. 거기서 뭣을 했을까, 결론은 나와있는 것이니까 따라하면 되지만 그것이 궁금하지 않아요? 스님의 의문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만고의 진리, 즉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자신을 파계한 자라고 비웃으며 등을 돌린 다섯 비구에게 보름동안 걸어가 펼쳐보인 첫 설법(4성제, 8정도, 12연기)의 위대함 때문에 자칫 가려지기 쉬운, 혹은 위대한 첫 설법에 맞춰 너무 고상하게 꿰맞춰지기 일쑤인 물음표를 인간의 눈높이로 낮춰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했다. 극도의 고행으로도, 지고의 선정으로도 끝내 못푼 숙제가 무엇이었길래?
그런데 내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나는 죽기 싫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느냐, 그런데 나는 죽게 돼 있다, 나는 죽기 싫다, 이거여. 이 모순된 두 명제 사이에 여러분들 뭐가 보입니까. 여기에 공통분모는 ‘나’입니다, 나. 이 나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꽂혔어요.
결국 부처님은 돌고돌아 처음으로, 세속의 복락이 예비된 왕자의 길을 버리고 거렁뱅이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최초의 질문으로 회귀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곧 생사해탈이었다. 고행과 선정으로 점철된 그 이전의 철환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극한 선정에 들면 마음은 알파파 상태가 돼 질문 순간 즉답이 보인다고 한다. 진정한 혜(慧)가 열리는 것이다. 보리수 아래서 삼일이다 칠일이다 삼칠일이다 하지만 부처님이 비로소 ‘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온세상 두두물물 속에 연기적 존재로구나, 하는 것이 훤히 보여버린 것이란 설명이다. 그 이전까지 부처님은 정작 물었어야 할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놔두고 생사해탈이니 깨달음이니 발버둥을 친 것이렷다.
깨닫고보니 ‘죽을 나’가 본래 없었는데 ‘죽을 나’가 있다는 착각을 하고 ‘죽을 나’가 안죽기를 바랐구나…거기에서 연기(緣起)를 보시고 무아(無我)를 보신 겁니다.
불교의 정수, 곧 ‘무아/공(無我/空)’이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내것이라고 할만한 것도 내가 옳다고 할만한 것도 없음은 애쓰지 않아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죽을 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음을 알면 한편 기쁘면서도 한편 허무하지 않을까. 스님은 이었다. 자아가 사라지면 전체가 하나에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지요.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었다고 나 혼자 즐길 까닭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 아닌가. 이후 45년 부처님의 삶은 새삼 설명이 필요없다. 불교라는 가르침은 어느 하나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사람을 건질 수만 있다면 문을 다 열어버리는 것입니다. 불법이 그토록 풍부하고 유연한(개방성) 연유를 스님은 이렇게 풀이한 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참행복을 살지게 하는 방법을 일렀다.
개념에 떨어지지 않으면 개념 이전의 천국이 느껴집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니 돈망천국(頓忘天國)입니다. 영어로 하면 Let it be입니다. 처음에는 좁게 느껴지지만 무한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유한의 세계입니다. 무한을 살 것이냐 유한을 살 것이냐,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현실에 뛰어들기 전에) 개념놀음을 한가지만 더하고 나가자면, 긍정을 유념하라는 것입니다. 지족천국(知足天國)입니다. 이 심리를 깔고 일을 하면 일도 잘됩니다. 탁한 에너지를 깔고 하면 일도 세상도 망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용타 스님은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전남대 철학과를 거쳐 이 대학원에서 ‘불교의 선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4세에 청화 대선사를 은사로 출가했고, 승려 신분으로 10여년동안 교사생활을 했다. 1980년부터 일과 수행의 통일 속에서 참행복 참진리를 체득하는 동사섭(홈페이지 www.dongsasub.org)을 이끌면서 (재)행복마을 이사장으로 있다. 카멜 삼보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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