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영진 목사님이 워싱턴 한인교회 목사님으로 시무하실 때 교회를 방문 중이던 한국 강원도의 단강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줄 것을 부탁받고 다음의 세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으며 그 후 젊은이들에게는 가끔 같은 취지를 이야기하곤 한다. 내 인생을 돌아본 아쉬움의 푸념인지도 모르겠다. 그 내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큰 꿈을 가져라. 사람이 꿀 수 있는 한에서는 꿈은 항상 실현될 수 있으며 꿈 없는 노력은 낭비가 된다. 둘째,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을 하여라. 노력이 머리를 대신해준다. 셋째, 하나님께 의지하면 나의 능력을 초월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두드리면 열린다.
내 나이 은퇴를 지나 나의 젊었을 때의 꿈이 있었는지 그로 인한 나의 노력의 열매는 무엇이었나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젊음을 군인으로 보냈고 자의 반 타의 반의 만학을 통해 제2의 인생을 학자로서 보냈다. 나의 기억으로는 나의 꿈은 군인이 아니었다. 실은 군의 길을 피하려 노력했으나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나로 하여금 군인의 길을 걷게 하였다. 내가 꿈꾸었던 어린 시절은 내가 장차 잃은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공헌해야겠다는 일이었다. 나는 소화 13년 3월 판의 국민학교(당시는 만주 하얼빈 보통학교로 불리었다) 졸업 사진을 아직도 갖고 있다. 1938년도에 해당된다. 사진첩에는 내가 졸업반 때 대만에서 식인종 습관을 막은 우봉의 연극에 참가하였으며 졸업생들의 기서(글 모음)에 내가 ‘대장’이라 쓴 글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대장이란 당시 내가 쳐다볼 수 없는 이상이었으나 군인이 되고파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으로 귀국한 21세의 젊은 시대는 친구들과 힘을 모아 한국을 자유롭고 평등한 일본을 앞지르는 이상 사회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목전의 꿈은 해방 당시 미국에 건너가 일본 학도병 출정으로 못한 학업을 마치는 일이었으며 그러기 위해 미국 가는 길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으며 군사영어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임시 조교 노릇까지 하며 조기 임관의 기회를 피하였었다. 군사영어학교가 문을 닫고 육군 사관학교 1기생의 입교를 도왔을 때의 조국의 실정이 나로 하여금 군인의 길을 걷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초급 장교로 있으면서도 서울대학 법과 2년생으로 편입돼 서울대 근처 동숭동에 있는 친구집을 이용, 군복을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대학이 종합대학으로 될 때까지 법과대학 강의실에 나갔으며 내가 군인으로서 전념하게 된 것은 준장으로 승진된 1952년부터 인듯하다.
나의 젊은 군대 생활은 사회정의감과 정직 성실하며 노력을 숭상하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이는 내가 부하를 인선하는 기준이었으며 내가 외지에서 자라서인지 나는 출신 도를 가리는 습관이 없었다. 겸손의 마음은 내가 오늘까지 유지해온 성품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동료들에 비해 진급을 늦게 하였으나 일찍이 군문에 가담한 결과로 나는 많은 이들에 비해서는 대체로 빠른 진급이 되었다. 나보다 아래 계급인 유능한 미군 고문관들을 접하면서 나의 동료들에 비해 늦은 진급을 불평하는 대신 나의 군대 계급이 세계적 계급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목표 삼았으며 나의 계급에 따른 능력 미흡이 국민에게 허용됨을 반성하는 태도를 유지했었다. 나는 다행히 군인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책만을 가질 수 있는 행운도 가졌었다.
나는 제2의 인생 개척을 위해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학사 석사와 박사 학위를 얻는데 만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였다. 그것은 내가 학위를 목적하지 아니하고 기초지식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의 덕이며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 원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나 나는 내가 중학과 고등학교 시절의 면학 태도를 고위 군사 직위 간에서도 유지할 수 있었고 집사람이 나의 5.16에 임한 태도에서 자긍심을 갖고 아이들을 기르며 생활을 맡아준 희생과 이해심의 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미국 수도에서 공부하기 원했다. 워싱턴 소재 가톨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 이유이다.
내가 워싱턴에서 머물게 되며 얻은 것도 많다. 장학사업에 전념하는 기회가 되며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1972년 11월5일 국내외적으로 처음 있었던 유신 반대 시위의 지휘 책임을 맡음으로써 교포사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 깨어졌다. 유신 반대에 참석한 자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막아보겠다는 생각으로 한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별로 활용할 기회도 없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지금은 한국 정부에도 미국 정부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만학의 공부에 졸업한 학교에 남다보니 학술면에서 별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수직 덕으로 한국 고려대학과 연세대학에서의 안식년을 넘어 만70세에 은퇴된 교수로서 고향 논산 건양대학에서 친구들이 은퇴한 후에도 만75세까지 5년을 교직에 머무는 이점도 보았다.
미국에 돌아와서는 국제한국학회 이사장을 맡는 영예도 가져보았으나 4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비극에서 아직도 탈피 못 하고 있다. 꿈이 별로 없었기에 그에 따른 열매도 별로 없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나의 젊었을 때의 낭만이나 희망을 넘는 시련이 되었다. 그 길을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이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시며 능력을 보태주셨다. 감사하며 하나님의 오묘한 능력과 사랑을 다시 느껴본다. 여생을 인도해 주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빌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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