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만난 선배가 “은퇴를 했더니 가장 큰 걱정이 건강보험이더라”는 한숨 섞인 하소연이 불경기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는 남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은퇴연금 제도가 없는 회사를 다녔던 그에게는 65세 이상 노인에게 제공되는 메디케어가 전부다. 병원비 분담액과 약값까지 커버하는 보험을 추가하면 한 달 요금만도 200달러(중산층 기준)는 훌쩍 넘는다는 것이다. 은퇴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아직 65세가 되지 않은 부인은 일반 보험에 별도로 가입해야 되는데 부부가 내는 보험료만 800달러에 달한다. 열심히 낸 세금 덕분에 1,700달러가 조금 넘는 소셜시큐리티 연금을 받고는 있지만 건강보험료로 절반을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은퇴자만이 아니다. 건강보험은 미국인들의 최대 고민거리다. 무일푼이라면 모를까 보험 없이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다가는 의료비 마련을 위해 집까지 팔아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미국 중서부의 시골 마을에는 이빨이 빠진 주민들이 많다. 당장 뽑아는 놨는데 새 치아를 끼울 돈이 없기 때문이다. 흑인 배우 댄젤 워싱턴이 주연한 ‘존 Q’도 나이어린 아들의 목숨을 살리려는 한 아버지의 절규를 통해 미국 건강보험 제도의 불합리성을 고스란히 지적한 영화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리는 요즘 같은 썰렁한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인들에게는 건강보험 문제가 주식시장 붕괴보다도 더 시급하게 다가서고 있다.
미국은 지금 금융 시장 붕괴에 이어 미국 기간산업의 근간을 이뤄왔던 자동차 산업의 붕괴에 직면해 있다. GM등 자동차 3사 대표들이 연방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250억달러를 긴급 수혈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의회의 반응은 냉담하기만하다. 문제는 보험이다. 자동차 회사들이 문을 닫아 발생하는 100만명이 넘는 실직자들과 연금으로 살아가는 은퇴자들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면 모를까 만성 질환자는 보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GM의 수익이 떨어져 주식값이 ‘정크’ 수준으로 떨어졌던 2005년 중반을 기준으로 GM은 자동차 한 대 팔아 평균 1,700달러의 전·현직 직원 의료보험에 쏟아 부어야 했다. 반세기전만 해도 은퇴자가 많지 않아 큰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자동차 산업의 고속 성장만큼이나 은퇴한 직원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남아 있는 직원들이 그들의 노후를 책임지기가 버거워 진 것이다.
지금 버락 오바마 차기 행정부의 화두는 경제 회생 못지않게 의료개혁이다. 연방 상원과 하원 의 양당 지도부는 지난 19일 의료보험 확대실시와 보험료 인상 억제를 위한 오바마의 차기 행정부 정책을 내년 회기에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보험 확대 실시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현재 오바마 당선자측은 전국민 의료보험을 단계적으로 실시하되 우선은 미성년자부터 추진하고 보험료 인상을 억제하겠다는 것이지만 건강보험 취급 회사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보험회사들은 차라리 자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됐던 지난 1994년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 여사의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면 건강한 사람의 보험료로 몸 약한 가입자의 의료비를 충당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손실 처리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보험료가 인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제도 있다. 전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자신은 건강하다며 가입하지 않는 주민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숙제로 남는다. 가입하지 않는다고 세금을 더 받을 수도 없고, 벌금을 부과하기도 힘들다.
한국에서 조차 전국민이 건강 보험 혜택을 보고 있다. 하물며 세계 경제의 70%를 차지한다는 최강 선진국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아직까지 논쟁 거리로 등장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전국민 의료보험 가입이 현실화 된다면, 또 건강상태에 관계없이 건강보험에 저가로 가입할 수만 있다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직장 떨어져 보험 날아갈까 걱정하는 직장인들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 질 것이다.
김정섭 국제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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