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붐으로 인한 급작스러운 인구 증가
캘리포니아의 주 승격 촉진제로 작용
철도가 발달한 현재도 동부 해안 도시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철도로 여행을 하려면 못해도 3일은 잡아야 하는데, 당시 도로도 변변치 않고 지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포장 마차로 대륙을 횡단하려면 못해도 5개월은 각오를 하여야 했다. 육로 여행은 선박여행보다는 염가이긴 했지만 도중에 마차의 파손, 전염병 등으로 위험이 많이 따르는 단점이 있었다.
선박인 경우는, 출발항(出發港)인 동북부에서 파나마 동해안까지 가서 일단 하선(下船)을 하여, 지금의 운하가 지나가는 곳에 나있던 엉성한 도로를 따라 서부로 도보 또는 마차로 횡단을 해서 서해안에 나와(당시는 파나마운하가 건설되어 있지 안았음),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는 배를 잡아타고 선박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3-5개월 정도를 잡아야했다.
국내에서 현지까지 가는 데도 그 처럼 긴 시간이 필요했고 어려움이 뒤따랐거니와, 외국서 달려온 49er들의 여행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웠다는 것이다. 우선 샌프란시스코로 항해하는 배를 잡기가 어려웠고, 승객을 초과 승선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여고(旅苦)는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인기척 조차 느끼기 어려웠던 벽지에 10만이 넘는 투기꾼들이 급작스럽게 한꺼번에 몰려들었는데 각자 소지품이라고는 삽자루 하나와 곡괭이 하나 정도였기 때문에 생활 필수품을 비롯, 의류 등은 모두 샌프란시스코나 중서부에서 도입한 것을 쓰게 돼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고, 이에 따라 생활비가 타지방에 비해 10배 이상이나 더 들어갈 정도였다. 특히 밀가루 값은 40배나 뛰었고, 토지 값은 불과 $16밖에 안하던 고장이 하루아침에 $45,000로 뛴 예까지 있었다. 당시 미국 일꾼들의 일당이 평균 $1.00 정도였는데 하루에 대략 $10-$20 상당의 금을 건졌기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벌이가 좋은 것 같았지만 실상은 생활비의 과다 지출로 시달리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게다가 이 고장의 불건전한 생활 풍토는 이 사람들을 더욱 궁지에 빠지게 하였다. 아무 오락이 없는 산중의 천막 생활이라 이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도박을 일삼았다. 채금(採金)량은 적어지고 일확 천금의 실현성도 차차로 희박해 짐에 따라 도박으로 봉창을 해보려는 족속이 늘었고, 금으로 벌은 돈을 손쉽게 불리는 수단으로 도박에 몰두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도박과 술과 여자는 언제나 붙어 다니게 마련이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남녀 비율은 12대 1이었다고 한다. 남자 12명에 여자 1명이라는 뜻이다. 어떤 기록에서는 당시 여자는 금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코로마 산중의 독신 금광꾼들을 노리는 모험적이며 야생적인 매춘부들이 산중의 밤세계를 지배 하면서 도박꾼들의 돈은 그 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무법천지였던 고장에 타락 사조까지 불어서 더욱 문란해지게 됐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금광꾼들보다는 그 고장에 생필품이나 금광 관련 기기, 용품을 대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돈을 벌었다.
금광꾼 들에게 천막을 공급하는 일을 하려고 코로마에 갔는데, 마음을 바꾸어 갖고 있던 천막원단으로 두터운 “진(jean)”바지를 작업복으로 만들어 팔아서 일약 부자가 된 Levi Strauss나, 새크라멘토에서 철물상을 하면서 거부가 된 Leland Stanford같은 사람들이 좋은 예이다. Strauss의 “진”은 “Levi”라는 상표의 “진”으로써 지금까지도 소비자들의 애호를 받고 있으며, Levi라는 이름은 마치 진의 대명사 같이 사용되고 있다. Leland Stanford는 서부의“아이비 리그”라고 일컫는 스탠포드 대학을 남겨 놓앗다. 헬리 웰스(Henry Wells)와 윌리엄 파고(William Fargo)는 수송업과 사채(私債)업을 하던 사람들인데 오늘의 Wells Fargo은행을 만들었다.
이민으로 들어온 49er중에는 유럽에서 포도재배와 포도주 생산업을 하던 사람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금광보다는 토질이 포도 생산에 적합한 인근 공지를 찾아서 대규모의 포도생산업을 시도하여 지금의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포도주의 시조가 됐다.
49er들은 하나의 특유한 사회공동체로써 캘리포니아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바 크며,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49er로 인한 인구증가는 캘리포니아를 정식 주(洲)로 승격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둘째로 금광 붐은 합중국 서부에 활기를 취입(吹入)해 당시까지 서쪽을 향하고 있던 국토 개척방향을 잠시 동쪽으로 돌리도록 하여, 대륙횡단 철도의 완성을 이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를 서부의 관문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하였다. 셋째로 평등 사조와 개척정신을 요인으로 하는 서부사회의 형성을 촉구했다.
이상과 같은 발전의 그늘에서 캘리포니아 원주민(Native Americans)들은 뜻하지 않았던 피해를 많이 보게 되었다. 1845년 현재로 15만 명으로 추정되던 이들의 인구는 1870년에는 3만명으로 줄었다.
49er들을 따라서 들어온 병균, 그리고 불건전한 백인들에 의한 부당한 살해 행위가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서부개척자나 49er들은 현지 원주민과 평화적인 공존을 한다던가, 주류에 흡수해서 동화를 시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일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면 서로 폭력행사를 마다하지 안았고 심지어는 멸종을 목표로 싸운 잔인한 백인 그룹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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