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정치인이 국민의 심판을 받는 제도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이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선거에서 지면 말짱 헛일이다. 많은 돈과 시간과 정력을 들여 하는 일인 만큼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 해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억지로 이기기보다는 오히려 깨끗이 지는 것이 장차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다. 1964년 미 대통령 선거가 그랬다.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는 ‘작은 정부’와 ‘강한 미국’을 모토로 내걸고 나왔다 민주당의 린든 존슨에게 참패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원리 원칙에 충실했던 그의 캠페인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고 그의 철학은 1980년 레이건 당선이후 20여년간 대부분을 집권해 온 공화당의 기본 정책이 된다. 1964년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한 사람이 바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안 되는 것을 치사한 방법으로 간신히 이긴 경우도 있다.
2004년 대선이 그랬다. 2000년 하이텍 버블의 붕괴와 2001년 9/11 테러로 큰 타격을 받은 미국 경제는 부동산 버블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고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이라크 전쟁은 갈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집권당이 연임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 때 칼 로브를 비롯한 공화당 일각에서 꾀를 낸 것이 동성연애자에 대한 기독교 우파의 반감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동성연애자 결혼을 금지하는 내용의 연방 헌법 개정안이 공화당의 선거 공약으로 내걸렸다. 이 바람에 기독교 우파의 몰표가 공화당에 쏠렸고 그 결과 조지 W.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오하이오의 보수파가 던진 10여만 표가 오하이오의 판세를 갈랐고 그와 함께 대선의 향방도 결정됐다.
그러나 부시와 공화당은 집권한 후 단 한 번의 헌법 개정을 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해봐야 안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연방 헌법을 고치자면 연방 의회 2/3의 동의와 주 정부 3/4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공화당 내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사람들은 어찌 됐든 선거에서 이겼다고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결국 독으로 돌아왔다. 이라크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금품 수수와 동성애를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의 스캔들은 꼬리를 이었다.
그 결과 2006년 선거에서는 12년 만에 연방 의회 다수당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2007년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경기는 급속히 악화됐다.
정공법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공화당이 다시 낸 얄팍한 꾀가 새라 페일린이다. 부시 독트린이 뭔지도 모르고 러시아와 가깝기 때문에 외교 문제를 잘 해낼 수 있다는 유치원 수준의 대답을 하는 사람을 71세 고령인 존 매케인의 러닝메이트로 택한 것이다. 기독교 우파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 내면 2004년 동성 결혼 반대 헌법 개정안 때처럼 오하이오에서 이길 수 있고 그러면 백악관도 바라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기독교 우파 표는 좀 모았을지 모르지만 중도와 심지어 공화당 온건 표까지 대거 떨어져 나왔다. 누가 봐도 자격 미달인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올 대선의 특징은 젊은 층, 지식인, 이민자, 소수계가 공화당에 등을 돌렸다는 점이다. 매케인이 압승을 거둔 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미시시피, 아칸소, 루이지애나 등이다. 이런 주의 지지밖에 못 받는 인물이 미국을 이끈 데서야 부끄러운 일이다.
매케인 참패에 일조한 페일린이 2012년 선거에 다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공화당이 기독교 우파 이외에 다른 미국인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백악관을 다시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백악관과 연방 의회 다수당 자리를 모두 내주고 초라한 소수 정당으로 전락한 공화당의 뼈를 깎는 반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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