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 변화가 시작될 때 내가 그곳에 있었다”
미국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이라는 역사를 기록한 지난 4일 밤 20만 인파가 모여든 시카고 그랜트파크에서 날개 돋힌듯 팔려나간 티셔츠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지난 2년 가까이 계속된 캠페인의 긴 여정을 지켜보며 전 미국이, 아니 전 세계가 그토록 반신반의 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한밤중 오바마랠리 축제의 한 복판에서 주름진 얼굴에 눈물과 웃음을 한꺼번에 담은 채 흑인 노인이 말했다.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똑같은 말은 뉘앙스는 달랐지만 다음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한 백인변호사의 새로운 아침을 맞는 첫 소감이기도 했다.
아직 미국의 22개주에서 흑백결혼이 불법이었던 시절에 흑인 아빠와 백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아이가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온 미국이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역사의 주인공은 벌써 소매를 걷어붙였다. 남북전쟁 와중에서의 링컨과 대공황 와중에서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못지않은 어려운 시기에 출범하는 오바마에겐 승리를 자축할 여유조차 허용되기 힘든 게 요즘 상황이다. 부시에게서 넘겨받아야 할 온갖 난제의 무게가 너무 엄청나기 때문이다. 루즈벨트는 취임전까진 경제정책 관여를 거부했다는데 오바마에겐 그럴 선택의 여지도 없다. 금융위기에서 전쟁, 헬스케어 개혁, 에너지 자립 등 시급한 이슈가 어느 한가지도 정돈되지 못한채 난립한 상태다.
오바마 당선은 역사적 상징성으로 대서특필되지만 무엇이 당선의 으뜸 동력이었는가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범위를 좁히면 경제위기이고, 좀 더 포괄적으로 표현하면 변화에 대한 갈증이다. 미국 유권자의 70%는 백인이다. 백인 유권자의 43%가 이번 선거에서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인종을 뛰어넘는 성숙한 의식을 갖춘 유권자도 있었겠지만 보다 보편적인 오바마 지지 이유를 펜실베니아의 한 백인 건설노동자가 이렇게 표현했다. “피부빛이 검정이든, 초록이든, 아니, 빨강이라도 상관 안해요, 그가 내 직장만 보장해준다면 난 찍어요”
이들의 오바마에 대한 기대는 상당히 높다. “우리는 이 동네를 바꾸고, 이 나라를 바꾸고, 이 세계를 바꿀 것”이라며 보다 잘 사는 새 시대 개막을 거듭 강조해 온 오바마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기대가 높으면 실망도 크다. 사실 대선 캠페인의 공약은 실현 가능성이 높지 못한 게 상례다. 그러나 여론은 별로 참을성이 없다. 충성스러운가 하면 변덕스럽다. 리더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는 한 계속되지만 리더가 약속을 저버리면 주저없이 등 돌리는 게 여론의 속성이다.
신임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취임후 첫 100일로 꼽혀왔다. 재선을 가늠해보는 첫해의 성공 여부가 이 시점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여건에서 출발했는데도 케네디는 성공적 첫해를 누렸는데 반해 카터는 선거후 실망해 등돌린 지지여론을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피그만 침공이라는 치명적 외교실책에도 불구하고 오랜 여운을 남긴 감동적 취임연설, 강온을 적절히 구사한 대 의회전략 등으로 젊은 대통령 케네디가 입지를 강화했다면, 노회한 레이건은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지키는 뚝심으로 그의 보수연합을 성공적으로 끌고 나갔다.
서로 다른 성향의 지지층을 횡으로 연결한 금년의 ‘오바마 연합’은 민주당 전통 표밭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도심의 흑인과 교외 주택소유주, 히스패닉 이민과 처음으로 정치참여에 나선 젊은 층에 더해 공화전통표밭의 보수층까지 제각기 이해가 다른 각계각층 그룹들이 한 지붕 아래 모인 것이 오바마의 민주당이다. 계속 악화되는 적자예산으로 대표공약의 성사도 불확실한데 보수와 중도, 리버럴이 제각기의 어젠다를 들고 오바마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 거기에 한층 막강해진 민주당 의회까지 당파적 보이스를 고집한다면 ‘초당적 타협의 새 정치’를 다짐한 오바마의 약속은 실현은커녕 워싱턴을 더 한층 양극화로 몰아가며 재기를 노리는 공화당을 기쁘게 할 것이다.
취임까지는 이제 75일, 이미 인선에 착수한 오바마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초당적 통치약속과 진보 어젠다 추진 사이의 균형도 잡아야 하고 변화의 속도에 인내심을 갖도록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랜트파크의 당선소감 연설에서 “갈 길이 멀고 험하다”고 전제한 그는 봉사와 책임으로 나라 재건에 동참하자고 격려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들을 향해서도 호소했다. “난 여러분의 표를 얻지 못했지만 난 여러분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내겐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여러분의 대통령도 될 것입니다”
오바마의 연설은 언제 들어도 진지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이젠 감동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역사적 상징에만 머물지 않기 위해서다. 위기의 시대란 국민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위대한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을 위기로 밀어 넣은 부시대통령도 8년을 머문 무대에서, 위기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준 오바마 대통령이 그보다 빠르게 4년만에 사라지는 일은 없기 바란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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