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전공을 바꿨다. 후대로 읽어 내려갈수록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만 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학계의 중진이 된 한 교수의 이야기다. 국사를 전공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좌절의 역사에 울화가 치밀어 전공마저 바꿨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사를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지도자 복이 없을까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개인적 소회인지 모르지만 조선조 선조(宣祖) 때 기사(記事)가 특히 그런 느낌이다. 사실이지 선조 재위 시만큼 인재가 많았던 시대도 드물었다. 당대의 거유(巨儒)에서, 경세가, 또 보기 드문 장재(將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할 인재들이 즐비했던 것.
선조를 정점으로 한 당시 집권세력은 그러나 이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결국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는다. 총체적 리더십 부재가 불러온 비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 반대의 경우가 고대 로마인 것 같다.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녔다. 법치의 개념이 투철하다. 시대를 정확히 내다본다. 거기다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귀족의 책무) 정신에 충실하다.
그런 사람들로 형성된 두터운 리더십을 바탕으로 정치적 천재들이 잇달아 출현해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시저, 아우구스투스 등. 후기로 내려와도 말 그대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황제에, 지도자가 한둘이 아니다. ‘위대한 리더십의 역사가 로마 역사’라는 정의가 가능할 것 같다.
미국도 훌륭한 지도자의 복을 누려온 나라다.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들의 면면이 우선 그렇다. 워싱턴, 제퍼슨, 해밀턴, 메디슨, 애덤스, 프랭클린 등등.
당시 미국은 유럽의 열강에 비하면 아주 조그마한 사회였다. 이 작은 공동체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걸출한 지도자를 한 시대에 그것도 여섯 명이나 배출한 것이다.
위기를 만난다. 그럴 때마다 미국은 위대한 지도자를 선출했다. 그리고는 그 위기를 해쳐나갔다. 미국 역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때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저 ‘지도자 복을 타고 났구나’ 하는 찬탄 밖에는.
링컨이 바로 그 한 예다.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에 대한 기대는 별반 높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하자 지도자로서 진면목을 보였다. 역사를 꿰뚫는 혜안과 불굴의 용기로 미국을 분열위기에서 건져낸 것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해리 트루먼, 그리고 최근의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 열전’은 계속 이어져 왔다.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 아니다. 재정적자 만이 아니다. 미국은 ‘심각한 리더십 결손’ 상황을 맞고 있다는 진단이 나와서다.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돼 있다. 블루 아메리카, 레드 아메리카 식으로. 이 미국에서 한 가지 컨센서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80%의 미국인이 리더십 위기를 당면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의회를, 또 사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비즈니스 리더들에 대한 신뢰도 말이 아니다. 개인 이익 추구에 골몰한 결과 미국 경제를 결딴냈기 때문이다.
그 리더십에 대한 불신감은 대선 정국에 그대로 반영되어 왔다. 무려 2년간 펼쳐진 사상 최장의 대선 레이스다. 그런데도 후보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다. 막판까지 여전히 불확실성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불확실성을 이코노미스트지는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가 미국인의 자신감 회복에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시 도박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경험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일부 그가 피력한 믿음에 대해 명확한 소신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매케인 지지에도 역시 모험이 따른다고 했다. 말하자면 최선의 지도자 보다는 리스크가 비교적 적은 편을 선택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새삼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올 미국의 대선은 어떤 선거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열전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가 그 답이 아닐까 본다.
리더십 부재는 미국이 맞은 가장 큰 위기일 수 있다. 미국이 계속해 이 같은 불확실성의 미로를 헤맬 때 미국의 리더십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 불확실성은 그리고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위대한 대통령 탄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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