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고 배신않을 관상 봐
“한번은 청와대로 가 박 대통령의 관상을 봤다. 김재규와 함께였다. 얼마 뒤 김재규는 ‘각하가 얼마나 영도력을 가질 수 있을 지’를 물었다. ‘박어흥 박어종(朴於興, 朴於終)’ 저 박씨가 일으키고 저 박씨로 끝을 낸다는 답을 주었다.”
“79년 봄, 김재규의 측근이 40명의 중앙정보부 직원들 사진을 갖고 왔다. 충직한 사람들을 골라달라는 거였다. 5명을 골라주었다. 나중에 10.26이 터지고 보니 바로 그 5명이 김재규 거사의 핵심이었다.”
워싱턴 보림사 경암 스님(사진)으로부터 박정희를 시해, 유신시대를 끝장낸 김재규(金載圭)와 얽힌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게 3-4년 전이다. 이를테면 그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상담역’이었으며 10.26 사건으로 인해 미국으로 도피하게 됐다는 짧은 사연이었다. 마침 그 이야기가 나온 것은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姜信玉)변호사가 한국에서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는 시점이었다. 경암 스님과 김재규 사이의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를 증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강 변호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기자에게도 더 이상 말을 열지 않았다.
“출가한 사람으로 옛 일을 거론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때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 현대사를 바꿔놓은 10.26사태가 발생한 지 29주년. 워싱턴 보림사로 다시 찾아간 기자에게 그는 잘 감아놓은 실타래를 풀듯 술술 ‘그때의 시절’을 끄집어냈다. 김재규의 가족들에 대한 소소한 내용까지 털어놓은 그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그의 주장과 증언은 아직까지 불분명한 ‘10. 26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는 것이었다.
경암 스님이 김재규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70년대 초반이었다. 하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서승완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김이 월남전에서 비둘기 부대장으로 있을 때 통역장교를 지낸 핵심 부하였다. 나중에는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부장이던 김재규를 보필했다.
서승완은 그를 보안사령관이던 김재규의 보문동 사저로 데리고 갔다. 입구에는 보안사 요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김은 그에게 관상을 봐달라고 했다.
“그는 을축년 10월4일 축시생이었습니다. 사자(獅子)상인데 천파살이 끼어 있어요. 미친 소세 마리가 사주에 들어있는데 14가지 망조가 3개가 붙어 곱하면 42가지 망조가 있다고 그랬지요.”
스님의 말에 김재규는 황급히 서승완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곤 “망조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정보부 계통으로 가 온갖 수사를 하면 나쁜 운이 사해진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김재규는 “안 그래도 각하가 날 그쪽으로 밀고 있다”며 스님의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것은 스님을 신뢰한다는 신호였다. 그 후 김재규는 모자를 쓰고 사복 차림으로 서울 근교에 막 들어서던 가든으로 그를 데리고 가 식사 대접을 하며 여러 자문을 구했다 한다.
얼마 뒤였다. 유정회 국회의원이던 김재규는 그에게 청와대로 가서 박 대통령의 상을 봐달라고 했다. 아침 일찍 청진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위에 잠옷을 입고 나오셨어요. 깜짝 놀라 속으로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게 김 의원이 이야기한 유명한 스님이구먼. 근데 상당히 젊네라고 말씀하세요.”
그때 그의 나이 30대 중후반쯤이었다. 충남 공주의 마곡사 청련암 암주로 있을 때였다. 그가 보니 박 대통령은 코 위는 매상이고 밑은 세파드 상이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유감스럽게 생각하시지 않는다면 말해보겠다고 다짐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무슨 말이든 기탄없이 해보라했다.
“사실 목숨 걸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파드는 3일 설사하면 죽는 운인데 각하께서는 벌써 3번 설사를 하셨습니다고 했어요. 대통령께서 그게 뭐냐고 하길래 첫째는 군으로 복귀한다는 공약을 어겼고 둘째는 고리대금 척결에 실패했으며 셋째는 유신을 한 거다, 이러니 ‘그래요?’하며 눈을 비상하게 떠시는 겁니다. 그러자 김재규가 다가와 옆구리를 꼬집어요.”
아침식사를 함께 한 박 대통령은 “스님한테 두둑이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일요일이었다. 다시 청와대로 호출됐다. 김종필과 이후락 중정부장의 대형사진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의 상을 묻는 박 대통령에 경암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이후락은 곰상입니다. 욕심이 과하니 주인을 물 수도 있습니다. JP는 독수리상입니다. 독수리는 사냥할 때 하늘을 빙빙 돌며 자신을 먼저 노출시키기에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각하는 숨어 있다 사냥을 하는 매상이기에 혁명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가 이처럼 최고 권력자들의 관상과 사주를 봐줄 수 있었던 건 월산 스님이란 대가 덕분이었다. 1962년 월산 스님이 소요산 자재암의 부속 백운암에서 계실 때 경암 스님은 1년반 모시며 주역과 광상학, 사주학을 익혔다. 월산 스님은 훗날 법주사 조실과 불국사 주지를 지냈다.
김재규와의 인연은 계속됐다. 김재규가 중정 차장과 건설부장관에 기용되기 직전에도 운을 봐주었다. 그 후 김의 부인과 가족들도 경암 스님을 종종 찾았다.
1976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는 사복차림으로 보문동 집을 찾아 그를 불렀다.
김은 그에게 각하가 얼마나 살고 영도력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종이에다 ‘박어흥 박어종(朴於興, 朴於終)’이라 써주었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일으켜 아무에게도 권좌를 주지 않고 마친다는 뜻이었다.
얼마 뒤 김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여주 아니면 이천 쪽으로 두 사람은 일박 여행을 떠났다. 박 대통령의 관상에 대한 화제가 오르자 그는 “청와대에서 상을 볼 때 빼놓은 게 있다”며 “매는 화살이 날아오면 세파드로 변하고 갈쿠리로 잡아채려면 다시 매로 변하기에 저격을 당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78년 9월경, 다시 김과의 ‘1박 여행’에 초대됐다. 이천 근처쯤의 한 모텔이었다. 김은 그에게 은밀히 물었다.
“매와 세파드 상을 가진 사람을 잡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나?” 섬뜩한 말이었다. 그는 자칫 역모로 몰릴까 조심스레 답했다.
“방법은 하나 있다. 문 하나만 있는 낮은 집으로 가면 잡을 수 있다.”
훗날 10.26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의 구조가 바로 그런 집이었다.
그날 밤 김재규는 의미심장한 말들을 쏟아냈다. “해룡스님. 민주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민주혁명은 당연한 거지만 지금은 일으킬 힘이 없지 않느냐”고 답했다. 그러자 김은 “한사람만 없어지면 된다. 박 할아버지다.”고 단호히 말을 꺼냈다. 또 권력남용과 독재를 비판하는 말들도 늘어놓았다.
그는 겁이 벌컥 나 “아이고 부장님. 그런 말씀 삼가시라”고 해놓고는 다음 날 일찍 서울로 돌아왔다. 방배2동의 ‘자연정사’ 주지로 있던 당시 그의 가명은 해룡 스님이었다.
그가 중정 요원들의 상을 봐준 것은 운명의 해인 79년 봄 무렵이었다. 당시 치안본부 근처 ‘봉원’이란 음식점에서다. 중정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이 식당에서 서승완은 40명의 사진을 꺼내 “이중에서 누가 배신하지 않겠느냐?”고 상을 봐달라 했다.
“제가 5명을 골라주었어요. 근데 10.26 후 보니 거사에 동원됐던 핵심 수하 5명이 모두 그 사람들이었어요.”
그날 이후 사형당한 박선호 과장과 수행 비서관 박흥주 대령, 경비원 이기주, 운전수 유성옥이 그들이란 주장이다.
유신 말기로 치달으며 철권통치는 더 심해지고 국민들의 불만은 증폭돼갔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전횡을 부리면서 권력 내부의 이반과 균열도 심해졌다.
10월이 왔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들이 민심을 얻으며 유신정권의 목을 졸랐다.
21일 아니면 22일 오후 4-5시경이었다. 김은 스님을 남산 근처 한 맥주집으로 불러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꺼집어냈다. 스님이 “차지철은 늑대상으로 위험한 놈”이라고 조언하자 김은 “늑대 새끼 같은 놈이 늑대 짓을 한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김이 부마사태 현장을 둘러보고 박 대통령에 실상을 보고하러 가자 차지철 실장이 막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중정부장의 만년필까지 분해 조사했다 한다. 차의 무례함에 기분이 상한데다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참총장에 알아보니 두 사람의 허가없이 차지철이 청와대 헬기로 공수부대를 부마 지역에 투입했다. 군 지휘체계조차 무시한 월권행위였다.
그날 밤 김은 보문동 사저에서 다시 경암 스님에 전화를 했다. “차 실장을 제거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김재규와 경암 스님의 마지막 만남이자 대화였다. 운명의 26일 저녁, 궁정동 연회장에서 김은 박 대통령과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말대로라면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마곡사 청련암에 몸을 숨겼다. 보안사 수사요원들은 ‘김재규의 측근 해룡스님’을 잡기 위해 두 차례나 절을 찾았다. 그는 해룡이란 가명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날 야밤을 통해 70리길을 달려 온양으로 도망친 그는 2년간 도망자 신세가 됐다. 한번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해양경찰에 잡히기도 했다. 결국 82년 조계사의 도움을 얻어 도미를 결행하며 그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됐다.
“김재규의 행위는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차지철에 대한 분노의 감정 때문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의 월권과 정보보고 방해만 없었으면 10.26도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래 지켜본 김재규란 인물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신념이 아주 강했던 사람입니다. 워낙 청렴한 사람이라 부정부패를 묵과하지 못하고 독재나 못된 것을 용납못했습니다. 그 성정 때문에 결국 사고를 친 것입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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