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참선 기공 태극권…생명과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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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호흡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들숨과 날숨을 잘 다스려라. 열반적정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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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은 몸안 탄산개스와 몸밖 산소를 맞바꾸는 생명의 소통작업
“가슴 말고 배로, 아기처럼 길고 깊게”
나쁜 자세에서 좋은 호흡은 불가능…기공과 태극권은
좋은 동작으로 나쁜 자세 가다듬고 좋은 호흡을 되찾는 자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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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 한인사회에 수선회(修禪會, www.koreanzen.org)라는 단체가 있다. 말뜻 그대로 선을 닦는 모임, 즉 참선모임이다. 이삼십명쯤 되는 회원들은 각자 틈날 때마다 참선을 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는 산호세의 선방(2175 The Alameda, Suite 213, San Jose, CA 95126)에서 약 2시간씩 참선 삼매경에 빠져든다. 물론 참선이란 무엇이며 왜 어떻게 하는지 등에 대한 공부도 병행된다.
실리콘밸리 IT전문가 박선흠씨는 수선회의 창립멤버 겸 핵심리더 중 한명이다. 박씨가 최근 회원들에게 눈길 끄는 전자우편을 돌렸다. 박씨의 기독교인 친구로부터 받았다는 전자우편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God created human through his breath according to Bible.? To realize my own breathing is same as realizing that the origin of my being is God. (하나님께서는 호흡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본보 23일(목) 종교섹션에 소개된 이 대목은 박씨가 지적한 대로 불교경전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에 나오는 부처의 가르침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수식관(數息觀)이라는 관법이 담긴 안반수의경 속 부처는 호흡을 잘 관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존재의 참모습을 깨닫는 수행의 기본임을 설파하며 들숨과 날숨 속에 열반적정이 있다고 강조한다.
’호흡’을 통해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흡을 통한 소통에 도교를 제외하는 건 넌센스다. 도교는 그 근본에서 벗어난 일부 도사들의 주술적 행위 등으로 그 이미지가 상당부분 곡해됐지만, 수천년 중국사를 관통해온 주요 철학사상 중 거대한 줄기다.
호흡 다스리기를 기본으로 하는 단전호흡과 기공, 나아가 태극권의 바탕철학에서도 도교, 즉 노장사상이 노른자위 구실을 하고 있다.
호흡이란 무엇인가. 숨이다. 숨은 생명이다. 밥은 몇끼를 굶어도 살 수 있고, 물은 몇사발을 안마셔도 버틸 수 있다. 숨은 단 한 가닥도 건너뛸 수 없다. 생명을 뜻하는 목숨에 ‘숨’이 붙은 까닭을 우연이 아니다. 목과 숨을 떼어놓으면 목숨이 아니듯 숨은 목숨 곧 생명의 동의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숨(들숨과 날숨)은 나와 나 이외의 모든 것(즉 우주)을 이어주는 최초 최후의 커뮤니케이션(소통) 수단이자 소통 그 자체다. 인간은 숨을 쉬면서 태어나고 숨을 거두면서 죽는다.
들숨과 날숨의 성분을 잣대로 보면, 호흡은 몸안의 ‘유해한’ 탄산개스를 내뿜고 몸밖의 ‘유익한’ 산소를 들이키는 작업이다. 이 개스교체 작업이 원활하면 그 생명체는 자연히 활기를 띤다. 별별 동작을 다 취하며 구슬땀을 흘리지만 생명살리기 운동 중 으뜸은 숨쉬기 운동이다. 나와 우주가 결국 하나라는 큰 깨달음까지 이어지는 참선의 호흡관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명칭부터 호흡이 붙은 단전호흡(단순히 호흡법이라고 해도 좋다)은 말할 것도 없고 기공과 태극권에서 바른 호흡법이 강조되는 건 당연하다. 호흡을 보는 관점에서 기독교 불교 도교가 상통하듯, 단전호흡 기공 태극권도 호흡을 매개로 한 근친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른 호흡은 어떤 호흡인가. 이에 대한 이론들은 수두룩하다. 읽다보면 도리어 숨이 찰 정도로 난해한 것들이 많다. 한 호흡에 간추리면 ‘길고 깊게’ 이것이다. 길고 깊게 숨을 쉰다는 건 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기처럼 숨을 쉬라는 말이다. 바른 아기숨과 그른 어른숨과 차이를 눈으로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배의 움직임이다. 아기들은 들숨을 쉴 때 배가 자연스럽게 볼록 나오고, 날숨을 쉴 때 그만큼 꺼진다. 어른들의 숨은 보통 배의 움직임이 없거나 미미하다. 아기들은 본래 타고난 대로 배로 ‘길고 깊게’ 숨을 쉬고, 어른들은 후에 버릇들여진 대로 가슴(폐)으로 ‘짧고 얇게’ 숨을 쉰다. 숨의 고향은 배(단전)다. 후천적 습관에 길들여져 차츰 고향을 떠나 위로 위로 올라가다 횡격막 너머 윗동네인 폐에 주로 머물며 들락날락한다. 그러다 너 윗동네 ‘목’을 넘은 뒤 돌아오지 않으면 ‘목숨’이 끊기는 것이다.
바른 호흡은 그러므로 새로 발명된 호흡이 아니다. 아기 때 숨쉬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술이 아니라 양생운동으로서의 태극권이 새로운 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디 자연스런 몸을 되찾은 운동인 것과 똑같은 원리다.
아기 때의 바른 숨쉬기가 차츰 나쁜 숨쉬기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쁜 자세(동작) 때문이다. 나쁜 자세는 부자연스럽다. ‘눈치를 알 필요도 알 계제도 없는’ 아기에게 부자연 나쁜 자세란 없다. 눕고 엎어지고 기고 뒹굴고 하는 동작들이 다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꾸며내는 움직임이 아니라 제 몸에 순순히 따르는 움직임이다. 의식적 움직임이 늘어나면서 부자연스런 움직임이 늘어난다. 바른 호흡은 그렇게 쌓인 부자연을 털어내는 것이다. 태극권에서 뼈대와 뼈대를 잇는 관절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함으로써(換骨) 살아가면서 몸에 쌓인 나쁜 습관의 찌꺼기들을 털어내는(奪胎) 작업이라고 한 것과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명의 시작도 끝도 숨이다. 중간도 물론 숨이다. 그러므로 숨은 생명의 단초이면서 궁극이다. 그런데 태극권을 수련하는 초기에는 호흡이 거의 무시된다. 무시한다기보다는 호흡에 신경쓰지 말고 우선 동작부터 익히는 것이 권장된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쁜 자세에서 좋은 호흡이 나올 수 없으므로, 우선 자세(동작)부터 바로잡는 것이다. 동작(動作)이 자연스러움을 되찾는 동안 호흡(呼吸)도 본래의 자연스러움으로 ‘자연히’ 되돌아가가게 된다는 이치다. 그래서 동작의 완성은 곧 호흡의 완성을 뜻한다. 이를 위해 동작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익히도록 체계화한 것이 ‘간이 24식’이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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