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가 출마 선언을 한 이후 2008년 대선에는 ‘역사적’이라는 수식어가 줄곧 따라 다녔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역사실현의 현장을 목격하려는 열망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 모은 흑백 후보의 ‘역사적’ 대결인 것을 감안한다면 금년 본선은 놀랄 만큼 비(非)인종 선거라 할 수 있다.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의 ‘갓 댐 아메리카’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 오바마가 행한 필라데피아 스피치를 제외하곤 ‘인종’은 이번 선거에선 큰 이슈로 부각된 적이 없다. 그것도 지난 3월 민주당 경선 때였고 본선에 들어선 더욱 그렇다.
우선 오바마 자신이 처음부터 피부빛을 내보이지 않았다. 화합과 변화를 강조한 자신의 중심 메시지와도 맞지 않았지만 ‘흑인 정치인’으로 낙인찍혀선 승리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퍼머티브 액션 등 대표적 인종관련 정책조차 강조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흑인 같지는 않은’, 그래서 거부감을 안 주는 그의 탈 인종적 캠페인은 백인유권자의 마음을 성공적으로 사로잡았다.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도 인종카드 사용은 자제해 왔다. 지난달부터 캠페인이 네거티브로 흐르긴 했지만 노골적인 인종 공격은 나오지 않았다.
오바마의 기본 전략과 매케인의 기본 품위가 일치하면서 ‘인종’은 이번 선거에서 사라진 것일까. “인종은 언제나 수면 아래 잠복해 있는 이슈”라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말했듯이 그건 아니다. 미국에서의 인종은 아직은 무시해도 좋을 이슈가 아니다.
투표를 12일 남겨둔 현재 표밭의 기류는 오바마 승세가 완연하다. 전국적 지지율도 14개 조사기관 평균 7% 포인트의 오바마 리드를 보이고 있으며 좀체 호전기미를 안 보이는 경제는 정권교체에 대한 유권자들의 갈망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매케인 역전의 마지막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인종’이다.
인종변수의 영향력을 내세우는 주장의 핵심 근거는 이른바 ‘브래들리 효과’다. 여론조사원에겐 흑인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으면서도 막상 투표소에선 흑인을 찍지 않는 백인유권자의 성향을 뜻한다. 1982년 한인들에게도 친근한 톰 브래들리 LA시장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가 여론조사에서의 리드와는 달리 백인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생겨난 용어다.
당시 ‘브래들리 효과’를 맨 처음 측정했던 UC버클리의 찰스 헨리 교수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종에 대한 인식은 변하고 있지만 아직 탈 인종시대가 온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바마가 브래들리 같은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투표일 직전 여론조사에서 “적어도 두자리 숫자의 리드를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다. 현재 오바마 지지율은 조사기관에 따라 들쭉 날쭉이다.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 14%포인트를 보인 리드가 AP/GfK의 조사에선 1%포인트에 그치고 있다.
브래들리 효과에 대한 반박분석도 만만치 않다. 이미 4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렀고 대선은 지방선거가 아닌 전국 선거이며 유권자 의식이 성숙해졌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리더급 흑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흑인 의원, 흑인 장관, 흑인 CEO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사회에선 흑인 대통령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흑인몰표로 ‘인종’이 오바마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과 함께 ‘역 브래들리 현상’까지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흑인 후보를 찍겠다고 밝히기가 껄끄러워 소리없이 오바마에게 투표할 공화당 유권자가 적지 않다는 보수 칼럼니스트 캐슬린 파커의 주장이다. 지난달 자질부족을 들어 페일린의 사퇴를 공개촉구했던 그는 이같은 속마음을 자신에게 알려오는 보수성향 독자들이 상당수라고 덧붙였다.
물론 브래들리 효과의 실체를 확인하려면 투표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금년엔 흑백 모두가 공유하는 경제 불안이 ‘인종’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인종’이 이번 선거에서 결정적 변수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더해주는 근거다.
연방헌법은 흑인의 투표권을 남북전쟁이후 1860년대 명시했지만 오바마가 태어난 1961년에도 남부등 상당지역의 흑인들은 투표권조차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었다. ‘오바마 대선 민주당 후보’ 자체가 민권운동의 성공적 여정을 증명한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지금도 미국인의 일상 곳곳에 엄연히 살아있다. 아직 마이너리티에겐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뉴스위크의 칼럼니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오바마의 당선으로 탈인종사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미국을 기대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겐 오마르라는 이름을 가진 9살짜리 아들이 있다. 난 그애가 이나라에서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만약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난 내 아들의 미래에 대해 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철수·이영희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딸의 교육을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한인부모들도 인도출생인 자카리아의 이런 기대를 공유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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