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대선을 앞두고 갤럽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현직 대통령인 공화당 부시와 민주당 잔 케리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는 이유를 물었다. 여론조사 결과 부시 지지자중 그의 정책에 끌려 선택했다는 사람은 단 6%에 불과했다. 케리 지지자도 13%만이 정책이 마음에 들어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후보의 정책적 입장을 요모조모 면밀히 따져본 후 마음을 정하는 유권자들을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정책보다는 리더십이라든가 인간적 친밀감 같은 다른 요소들에 이끌려 지지후보를 결정한다. 국가를 이끌어 갈 대통령을 선출하는데도 이미지가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당의 기본적 역할도 후보자를 멋지게 포장해서 파는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 전당대회는 늘씬한 모델들을 내세워 신제품을 소개하는 화려한 오토 쇼처럼, 현란한 이미지로 후보를 포장해 국민 앞에 소개하는 정치적 쇼로 변질되고 있다. 후보자의 본질은 이미지 속에 파묻혀 버려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공화당 전당대회 후 반짝 불었던 새라 페일린 열풍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향은 부시와 민주당 앨 고어가 맞붙었던 2000년 대선에서도 확연했다. 차갑고 냉철한 고어보다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수더분한 부시의 이미지에 이끌려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많았다. 부시는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은 후보”라는 이미지를 백분 활용해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지난 주말 개봉한 올리버 스톤의 영화 ‘W.’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영화다. 할리웃의 대표적 리버럴인 스톤 감독이 만든 만큼 가차 없는 비판과 조롱으로만 가득 차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인간 부시에 대한 따스한 시선도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아들 부시의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이다. 젊은 시절 그를 잭 대니얼스와 보드카를 주스처럼 입에 부어댄 술주정꾼으로 만든 것도, 또 자신을 무시하는 부모에게 보복이라도 하듯이 정치적인 도전에 나서도록 한 힘도 이런 콤플렉스였다.
아버지 부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W.에게 툭하면 200년 동안 쌓아 온 부시 가문의 명예를 들먹이며 “넌 나를 실망시켰다”는 말을 해댄다. 똑똑한 동생 제브와의 비교가 빠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오죽했으면 대통령이 되고 난 후까지 아버지에게 무시당하는 악몽을 꾸었을까.
이런 콤플렉스는 W.가 뒤늦은 나이에 술을 끊고 기독교 신앙으로 거듭난 후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다행히 그에게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타고 난 능력이 있었다. 이슈에 해박하지는 못해도 유권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장점을 잘 살려 정치적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오른다.
어려서부터 W.의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콤플렉스가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에는 분발의 채찍질이 됐지만 문제는 그가 사다리의 정점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서부터이다. 대통령이 된 W.는 독선과 불안을 자주 드러낸다. 영화 말미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W.에게 “이라크 전쟁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조언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대통령의 대답은 단호히 “아니다”였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더 높은 곳의 아버지가 있다”고 덧붙인다. 근본적으로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보는 W.의 십자군적 인식과, 육신의 아버지보다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경쟁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남들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며 부러워하지만 유력 가문의 장자로서 중압감에 눌려야 했던 W.의 인간적 고뇌에 연민이 느껴진다. 또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 최고 권력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입지전에는 교훈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W.의 집권 기간에 미국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으며 현재 W자로 상징되는 ‘더블 딥’ 침체를 지나고 있다. 물론 부시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릇이 안 되는 인물에게 너무 큰 칼을 쥐어준 것은 바로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W.는 대통령이 됨으로써 ‘가문의 영광’은 이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영광’이 되지는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일에는 균형 잡힌 인식과 지성이 기본적으로 뒷받침 돼야 한다. 여기에 친근감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선후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유권자들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패착의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