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를 무시한다..살해도구 준비해 `묻지마’ 범행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송진원 임형섭 기자 = 서울 강남에서 30대 무직자가 20일 `세상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거주하던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오는 투숙자들에게 흉기를 마구 휘둘러 6명이 숨졌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는 피의자 정모(31)씨를 현장에서 체포해 조사하고 있으며 이르면 21일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고시원에서 방화 후 `묻지마’ 흉기난동으로 6명을 숨지게 한 정모씨의 범행 증거물이 20일 강남경찰서에서 공개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이날 오전 8시 15분께 고시원 3층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른 뒤 복도로 뛰어나온 고시원 투숙자들을 흉기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고시원에 사는 여성 6명이 숨지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xyz@yna.co.kr 한상균
◇사건 발생 = 정씨는 오전 8시 15분께 강남구 논현동 D고시원 3층에 있는 자신의 방 침대에 라이터 연료로 쓰는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복도에 기다리던 정씨는 8시 20분께 연기가 고시원에 가득 차 투숙자들이 복도로 뛰어나오자 하나씩 마주치는 대로 5∼6명에게 갖고 있던 흉기를 마구 휘둘렀다.
경찰은 정씨가 연기 속에서 앞을 주시할 수 있도록 고글과 마스크를 착용했고 전방을 밝힐 헤드랜턴(머리띠형 전등)도 착용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8시 30분께는 고시원 4층으로 올라가 연기 속으로 보이는 투숙자 4∼5명도 같은 방식으로 흉기로 공격했다.
탈출에 성공한 김모(33.여.중국동포)씨는 잠을 자는데 8시 40분부터 9시 사이에 여자와 남자가 싸우는 소리가 나서 3층으로 내려가 보니 연기가 막 나고 `살려줘’하는 소리도 났다. 바닥에는 피가 낭자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8시 51분께 112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에 출동해 불이 꺼지자 9시 20분께 고시원 4층 창고에 대피했다가 소방대원의 인도를 받아 나오던 정씨의 옷차림이 수상하다는 점을 들어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해 체포했다.
◇살해 준비 = 경찰은 범죄 의도가 강하게 담겨 있는 정씨에 대한 피의자 신문 내용과 압수한 살해 도구로 미뤄볼 때 정씨가 사전에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정씨로부터 검은 스키 모자와 검은 색 마스크, 헤드랜턴, 총알이 모두 장전된 리볼버 가스권총, 권총집이 딸린 가죽 허리띠, 과도 2개, 회칼 1개, 권총형 라이터 2개, 라이터용 휘발유 2통을 압수했다.
조사 결과 정씨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모자와 마스크, 상하의, 신발을 모두 검정색으로 맞춰 입고 회칼을 들었으며 과도 2개는 예비용으로 바지 속 두 다리에 찼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씨는 경찰에서 회칼은 2005년 여름 동대문 중앙시장에서, 과도는 같은 해 여름 강남구 논현동 시장에서, 가스총은 2004년 2월 강남구 포이동에서 구입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정씨로부터 확보하고 정씨가 구입한 도구들을 보관하며 오래전부터 범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사상자들 = 정씨의 방화와 흉기난동으로 모두 6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태에 빠졌으며 3명이 경상을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상자 13명 중 중국동포 여성이 6명 포함돼 있다.
서진(20)씨, 민대자(60)씨, 이월자(50.중국동포)씨, 조영자(53.중국동포)씨, 김양선(45)씨, 박정숙(52.중국동포)씨 등 사망자는 모두 여성이며 5명은 흉기에 찔려 숨졌고 1명은 유독가스와 열기를 피하려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가 사망했다.
경찰은 김보금(45.여)씨, 장채옥(41.여.중국동포)씨, 김대영(29)씨 등 중상을 입은 투숙자들이 있어 사망자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고시원은 4층 건물의 3층과 4층을 빌려 침대만 딸린 월세방 85개(3층 50개.4층 35개)를 운영하고 있으며 고시생은 전혀 없고 근처 영동시장에서 일하는 이들 등 69명이 저렴한 주거지로 삼아 투숙해왔다.
사건 당시 자고 있던 투숙자 일부는 건물에 설치된 완강기를 타고 내려왔으며 소수는 베란다로 나가 문을 닫고 연기를 피하다가 소방대원과 경찰관들이 투입된 뒤 구조를 받았다.
◇범행 동기 = 정씨는 경찰에 체포되고 나서 세상이 나를 무시한다. 세상을 살기가 싫다라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정씨가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묻지마 범행’의 대상으로 자신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고시원 투숙자들을 선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정씨가 이전부터 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번과 같은 범행을 기획해 다른 사람과 함께 죽으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정씨가 최근 들어 고시원 월세와 휴대전화 요금을 내지 못하고 예비군 훈련 불참에 따른 벌금 150만원을 미납해 수배되는 등 금전적 압박을 받아왔다는 사실도 경찰은 주목하고 있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아직 조사하고 있지만 생계가 쪼들리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증폭됐다는 게 범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정씨는 2002년 8월께 경남 합천에서 혼자 상경해 2003년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강남ㆍ경기 지역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해왔으며 최근에는 일정한 직업이 없이 고시원에서 지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정씨와 목격자들의 진술과 압수한 `살해도구’를 토대로 정씨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뚜렷한 목적 아래 계획적으로 범행했는지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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