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타임스 창설자의 한 사람인 박보희 씨는 6.25가 나자 국민학교 교사직을 접고 육사에 지원했으나 낙방의 위기에 처했다. 영어에 빵점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답안지에 ‘저의 입학을 허가하여 주시면 영어에 일등을 하겠습니다’ 라고 써놓았다. 턱걸이 입학이 되자 그는 분골쇄신 맹렬히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영어사전을 통째 외워나가는데 외운 것은 아예 입으로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한다. 에피소드의 진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런 그가 일찍 미국에 건너와 한때 그가 예속된 한 종교단체의 납세문제로 국회 청문회에 섰었다. 그의 태도는 단정하며 침착하였고 어휘의 선택은 신선하고 세련되어 있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드나든 그 어느 한국의 유명인사보다도 이중 언어에 능통한 인상을 주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오렌지, 어륀쥐 하며 호들갑스럽다. 참된 영어교육이 아니라 영어 회화 훈련이다. 국력의 소모가 막대하다. 그럼 이웃 일본의 외국어 교욱은 어떠하였을까. 1867년 명치유신을 계기로 부국강병의 기치를 들고 다른 한편엔 교육입국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51개나 되는 가나 글자를 갖고도 26개의 알파벳이 엮어내는 구문상의 합리성과 맥도날드를 ‘마구도 나루도’로 표시할 수밖에 없는 표음의 한계를 느낀 그들 개혁자들은 우선 번역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해외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엘리트들을 동원하여 동화집은 물론 세계 문학전집의 번역을 완성시켜 놓았다. 거친 음식을 되씹어 유아를 먹여 기르듯 서구문화를 흡수하고 여과하여 자기 것에 퓨젼 시켜나간 것이다. 나쓰메 소우세끼, 고이즈미 야구모(귀화 영국인) 모리 오우가이(독일어)들이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작년 어느 한국의 유명작가 한분이 자기는 초등학교 때 이미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었노라고 말을 하니 동료 문인들이 웃기지 말라고 조롱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일제 강점 통치하의 국어(일어) 책 5학년 8과 혹은 9과쯤에 분명 리어왕의 얘기가 나와 있었다. 죽음을 앞둔 리어왕이 세 딸을 궁전에 불러 그들의 충성심을 다짐하는 자리에 신통치 않은 답변을 들은 왕은 마당에 뛰어나가 “비야 내려라. 하늘 문을 뚫고 폭포같이 쏟아 부어라!” 라고 외치며 울화를 터뜨리는 이야기였다.
‘현지영어 뉴욕영어’의 저자 임귀빈 씨(미주 한국일보에 연재중)가 지적한 대로 가정에서 모국어를 쓰는 사람의 영어를 원어민과 비교할 수는 없다. 미 성조기
신문사와 고교 영어교사 13년, 미국정착 41년이란 나름대로의 이력을 가진 본인이건만 워낙 범인인 탓인지 아직 스러링(어, 아, 하며 머뭇거리는) 현상을 면치 못 하고 있으나 액센트에 스트레스 만큼은 명확히 주어가며 회화의 유연함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좋은 원어민 환경에서 영어사전 한권쯤 외워보는 열정도 가질 만하다. 이 땅에서 좋으신 영어 선생님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노인과 바다’의 쌍티아고가 작은 판자 어선을 타고 84일 동안 고독을 이겨내고 광풍랑과 싸워나가다 거대한 마코 상어 한 마리에 마주치듯 영어공부에도 왕도는 없다.
르 클레지오의 문학세계
박창호/ 공인세무사
대표작 ‘조서’(The Interrogation-1963)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오는 12월10일 스톡홀름에서 108번째 2008년 노벨 문학상, 140만 불 상금을 받게 될 68세의 프랑스 작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Jean-Marie Gustave Le Clezio)는 7살 때부터 작가 활동을 전개한 1940 년 4월13일생의 세기적 문학 신동이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인이란 국적의 한계를 초월한 세계의 시민으로 소외자의 입장에서 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을 유지한 뛰어난 문학가인데, 그의 성격은 매우 소탈하고 또 겸손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인간을 배워라’라고 갈파한 세계적인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말은 바로 ‘르 클레지오’ 같은 매우 소탈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지라고 한 말이라고 필자는 본다.
그는 한국에도 수차례 다녀간 친 한국파 서구문학가이기도하다. 특히 한국의 고유문화 가운데 독특한 ‘정’(情) 이란 개념에 크게 매혹된 바 있다고 일찍이 기술한 적이 있는데 서구 문명 중심 사회에서 용감히 탈피해서 자연적인 세계로 진출하려는 그의 문학 세계관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와 끊지 못할 인연을 맺게끔 매혹시켰던 것이다. 참다운 작가는 지역주의, 민족주의의 소극적인 정서를 탈피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넓은 마음으로 온 세계를 가슴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이다. 후배 노벨 문학 수상자들, 특히 우리 한국 문학작가 들에게 값진 교훈이라고 필자는 본다.
1991 년 일종의 자서전 형식으로 저술한 소설 ‘오닛샤’(Onitsha)에서 르 클레지오는 의사인 부친을 따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보낸 10여 년간 유년시절의 경험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의 대부분 문학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매우 개방되어 있다. 특히 문명과 풍습이 상이한 문화권 독자들의 다수가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문학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안토인 콤패그논(Antoine Compagnon) 콜럼비아 대학 교수의 말이다. 르 클레지오는, 자기는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를 존경하지만 루소가 과연 누구라는 사실을 아직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비판한 적도 있다. 그는 또 자기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실토한 적이 있다. 어떤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면서, 후배 작가들에게 무슨 전해줄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의 메시지는 매우 간단명료합니다. 우리는 모두 소설을 좀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현세대를 향해 극히 피상적이고 또 정답이란 것이 없는 그러한 질문들을 내놓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는 한 어떤 기술공도 아닙니다. 소설가는 오직 글을 쓰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그는 그의 소설을 통해 여러 가지 질문을 내놓습니다”라고주장하기 도 했다.
열병(Fever-1965), 홍수(The Flood-1966)등 일련의 작품에서 르 클레지오 작가는 물질화되고 기능화 된 현대 도시문명의 거센 현실 앞에서 인간의 진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전면적인 회의를 시사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르 클레지오의 문학 작품을 다룬 몇 개 안 되는 출판사 가운데 데이비스 고다인(David R. Godine)출판사가 그의 작품을 페이퍼백으로 출판할 계획이라고 전한다.
1901년 이후 역대 노벨 문학 수상자 108명은 대부분이 서구작가들, 주로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미국 작가들이었고 동양인은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913),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와 오에 겐자부로(1994), 그리고 중국 극작가, 가오싱젠(2000) 등 고작 4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전체 동양인 4명 중 2명이나 배출한데 비해 우리 한국에서는 아직 1명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뼈아픈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수년 내에 차기 노벨 문학 수상자가 우리 대한민국에서 속속 출현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기위해서는 문명과 문화의 동질의 벽을 넘어서 세계의 시민으로서, 르 클레지오가 말하는 오직 한 여행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기술하는 문학작품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쏟아져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서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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