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문에 실린 한 만평이 눈길을 끈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부시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신문의 헤드라인은 연방정부가 은행지분을 사들이고 있다는 내용이다. 카스트로가 한마디 한다. “부시 이 친구 잘 하고 있구먼.”
카스트로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니 뭐니 하면서 규제를 완전히 풀어버렸다가 금융위기에 기겁해 민간은행 국유화에 가까운 조치를 취하고 나선 미국정부가 뒤늦게 쿠바 흉내를 낸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만도 하다. 어쨌든 미국 정부가 민간은행 지분을 사들이고 각국 정부가 공조를 다짐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13일 뉴욕 증시는 사상 최대 폭으로 뛰어 올랐다.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일단은 약효를 발휘한 셈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지구촌을 흔들어온 금융위기는 ‘유동성의 위기’가 아니라 ‘신뢰의 위기’이다. 미국 정부가 수천억달러의 구제금융 법안을 마련해도 약발이 먹히지 않았던 것은 액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이것만으로는 꺼져가는 신뢰의 불씨를 되살리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방화용 물을 공중에서 살포하듯 ‘헬리콥터 머니’를 여기 저기 뿌려 대도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패닉의 불길은 잡히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불안 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규제철폐와 무간섭이라는 이념적 입장을 버리고 연방정부가 적극 조치에 나선 덕에 일단 불길 확산은 막았다. 하지만 신뢰 회복을 운운하기엔 너무 이르다. 모든 것이 그렇듯 신뢰 또한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다시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심리학자인 줄리안 에드니 박사가 몇 년 전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보울 안에 너트를 집어넣고 학생들에게 손으로 먼저 집는 만큼 학점을 더 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매 10초마다 너트를 늘려 나갔다. 이론적으로 서로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하게 집으면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은 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학점이 걸리자 현실은 달랐다. 참가 학생의 65%가 1라운드도 넘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으며 나머지 학생들도 몇 십 초 지나지 않아 탈락했다. 약간의 상호신뢰만 있어도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살벌한 게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평소 얌전하던 학생들까지 탐욕스럽게 변해가는 데는 에드니 박사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에드니 박사는 실험 후 이런 유명한 결론을 내렸다. “탐욕은 신뢰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에드니 박사의 결론은 지금의 금융위기, 경제위기가 왜 초래됐는지를 한마디로 설명해 준다. 사회주의가 사망선고를 받고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성공과 승리만이 가치 있는 결과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탐욕은 이를 향해 지치지 않고 줄달음치게 해 주는 에너지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신뢰라는 가치가 들어설 만한 자리는 없었다. 현 경제위기의 시발이 된 서브프라임 사태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시장에 끌어 들인, 정직과 신뢰를 저버린 경제행위에서 비롯됐다. 실천적 지식인 노엄 촘스키는 신자유주의를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는데 그의 비판은 기업들의 탐욕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무수한 개인들에게서 고스란히 확인되고 있다.
경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탐욕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신뢰를 하루속히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국가의 간섭과 개입으로 정책적 신뢰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리더십의 신뢰회복이다.
부시 대통령이 두 번이나 국민들 앞에 직접 나서 패닉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시장 상황이 나빠졌던 것은 리더십에도 신뢰 위기가 심각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가 요동치고 불안한 것도 리더십의 신뢰 상실이 한 원인이다.
신뢰의 리더십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 어네스트 섀클턴이다. 20세기 초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배가 얼음에 갇히는 바람에 18개월이나 극한의 고초를 겪었던 탐험선 인듀어런스호의 대원들은 섀클턴의 인도 아래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돌아왔다.
대원들은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섀클턴이 리더라면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줬던 리더십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대원들이 그대로 믿고 따르는 신뢰의 리더십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런데 요즘의 리더들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다음 번 미국의 재무장관으로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워런 버핏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버핏이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그는 대중의 변함없는 신뢰를 받는 몇 안 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나선다면 궁지에 몰려 있는 신뢰가 한층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한 사람의 믿음직한 이름이 수천억달러의 돈보다 더욱 절실하고 가치 있는 신뢰 위기의 시대를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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