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진화를 둘러싼 논쟁이 일고 있지만 과학자들 사이에는 인간의 조상이 한 때 나무에서 살았다는 데 대해서 이론이 없다. 인간이 어떤 동물보다 정교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시각적으로 공간 지각력이 뛰어난 것도 나무 가지를 붙잡고 수풀 위를 날아다니며 살던 결과라는 것이다.
열매가 사방에 널려 있고 자기를 잡아먹을 육식 동물도 별로 없는 지상낙원 같은 나무 위를 놔두고 왜 인류의 조상이 땅 위로 내려오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기후 변화로 숲이 물러가면서 어쩔 수 없이 사자와 하이에나가 들끓는 사바나에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이것이 먹이 감인가 아니면 나를 먹으려는 것인가를 빨리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을 내릴 때는 여러 정보를 종합해 이성적으로 따질 겨를이 없다. 머뭇거리다 나타난 동물이 사자일 경우 짧은 삶의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고 그런 동물의 유전자는 후손에 전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의 조상들은 위험을 재빨리 감지하고 즉시 이를 행동에 옮겨 달아나는데 익숙한 이들이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감정 중 먹이에 대한 욕망과 자기를 먹이로 삼으려는 동물에 대한 공포가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생명체는 멸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감정 중 더 강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공포다. 먹이 감은 한 번 놓쳐도 다음 기회가 있지만 먹이의 대상이 되는 경우 판단이 늦을 경우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육식 동물의 냄새를 알아내는 능력은 물론 그의 출현을 알아낸 후 ‘공포의 냄새’를 풍기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아직 사자를 보지 못한 주위 사람들도 이 냄새를 맡고 같이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단 사람들이 ‘공포의 냄새’를 맡으면 이성적인 토론은 소용없다. 극장 안에서 불이 났을 때 한 줄로 차례차례 줄을 서면 모두 빠져 나올 수 있는데도 서로 먼저 나오려다 깔려 죽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류는 오래 전에 사바나를 떠나 직장에 출퇴근하며 먹을 것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생활 습관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미국 월가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나 뉴욕의 증권시장에서나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과 공포다.
80년대 이후 지난 20여년간 월가를 지배해 온 주된 감정은 욕망이었다. 2000년대 들어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한 때 공포가 고개를 들기도 했으나 그 뒤를 이은 부동산 버블이 부풀면서 월가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욕망의 잔치판이 돼 버렸다. 따지고 보면 이는 월가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중국과 브라질, 인도와 러시아 등 소위 신흥 개발국들도 이 잔치에 동참했다. 대다수가 욕망에 눈이 먼 때는 아무리 합리적인 경고를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욕망의 시대는 가고 공포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베어 스턴스와 메릴 린치 인수합병, 리먼 파산, 패니 메이와 프레딕 맥, AIG 구제 금융에 이은 부실 모기지 청산 공사 설립이라는 극약 처방에도 전 세계 금융 시장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모든 시장은 상승과 추락을 반복한다. 그 등락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공포의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역사는 탐욕이 극에 달한 후에는 하락이, 공포가 세상을 뒤덮은 후에는 상승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악재로 포위된 듯한 지금 한 가지 위안을 주는 것은 어떤 불황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것이다. 사상 최악이었던 대공황을 촉발한 주가 폭락도 1929년부터 시작돼 4년 후에는 끝났다. 많은 전문가의 예상대로 이번이 대공황보다 나쁘지 않다면 작년부터 시작된 주가 하락은 1~2년 내 바닥을 칠 것이며 경기도 회복세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욕망이란 버블이 터진 후 찾아오는 것은 공포라는 불청객이란 것이 이번 월가의 금융 쓰나미가 주는 교훈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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