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심신의 평화혁명을 위하여
지난 13일 토요일 아침 8시쯤, 샌프란시스코 금문공원의 호수 서쪽(바다쪽) 끝. 호수둘레 산책로와 호수 사이에 있는 적당히 넓고 적당히 좁은 시멘트 공터에서 선홍색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껑충 뛰었다 납작 숙였다, 좌로 돌았다 우로 틀었다, 중국영화에 자주 나오는 갖가지 동작으로 1시간가량 땀을 뺀 노인 네명이 비로소 운동을 멈추고 미리 준비해간 물을 들이키며 주섬주섬 떠난다.
떠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40, 50대 남녀들이 들어선다. 조금 지나자 20, 30대도 하나둘 나타난다. 60대나 70대로 보이는 희끗희끗 노인들도 있다. 주고받는 인사말로 미뤄 대개 중국계다. 간간이 백인들도 있고, 흑인들도 더러 있다. 백인청년이 향도처럼 호수를 향해 맨앞 왼쪽에 자리를 잡는다. 대오는 자연히 그 옆으로 뒤로 양팔 간격으로 이어진다. 휘적휘적 몸통을 돌리거나 빙글빙글 무릎을 돌리면서 몸을 푼다.
8시30분이 가까워지자 저 아래 창고 같은 건물 옆 공터 쪽에서 열댓명이 한꺼번에 올라온다. 모두들 키보다 훨씬 큰 봉을 추켜들었다. 거개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1시간 남짓 중국 전통무예인 팔괘권(八卦拳)을 수련한 이들이다. 그중 한명, 머리를 길게 묶어내린 중년여인이 대오를 스쳐 호수를 등지고 선다. 영어와 중국어로 카랑카랑 목소리와 유들유들 동작으로 팔괘장을 지도하고 약속대련 때는 그녀와 파트너를 이뤄 시범했던 노인도 귀가하지 않고 이 야외교실 주변 벤치에 앉거나 서성거리며 지켜본다. 그는 태극권과 팔괘권 고수인 75세 빌 친 노사다. 야외교실 앞에 선 중년여인은 그의 제자인 태극권 수련 19년의 로스 퐁 사범이다.
8시30분. 인원은 어느새 스물댓명으로 늘었다. 헤아리는 도중에도 한사람 한사람 늘어난다. 퐁 사범이 낮은 목소리로 뭔가 말하는가 싶더니 이내 남녀노소 인종다양 야외교실 학생들의 느리고 조용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무릎을 서서히 굽히며 두 팔을 어깨높이로 올리는가 싶더니 올라갈 때 속도로 올라갈 때 그 길을 따라 내린다. 손내림이 끝났다 싶더니 곧 발과 허리와 몸통이 오른쪽으로 통굴리듯 움직인다. 좀 전에 오르내린 손의 속도나 이 속도나 영락없이 같다.
그 사이에 두 손은 마냥 허리와 옆구리 사이 높이에서, 아랫배 양쪽에서 그냥 노는 게 아니다. 몸통이 돌아갈 때부터 행보를 같이 해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원을 그리더니 위아래서 손바닥이 마주 보며 스치고는 그때껏 속도를 그대로 간직한 채 꼬이면서 마주보는 손의 위아래가 바뀐다. 어느 동작 하나 빠른 게 없는데 어느 동작 하나 차분히 구경할 겨를이 없다. 느리고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어느 순간 멈춤도 없이, 어느 부위 쉼도 없이, 발 발목 무릎 허리에서 몸통 어깨 목 머리까지 손 손목 손바닥 손가락에서 심지어 시선까지, 부분부분이 찰나찰나에 저마다의 길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자전하고 공전한다. 모였다가 흩어진다. 위아래가 되고 좌우가 된다.
그러는 사이에도 수련생들은 하나둘 늘어난다. 정해진 자리는 없는데 오는 순서로 종으로 횡으로 적당히 이어붙는다. 미리 온 동학들의 율동에 자연스레 합류한다. 9시쯤 되니 그 숫자는 마흔명 남짓이다. 구령도 없고, 기합도 없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발을 옮기고, 물살 없는 수족관의 해파리처럼 손을 저으니, 그곳에서 나는 소리라곤 다 합쳐도 한줌뿐이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나 신발과 바닥이 만나고 헤어지는 소리가 고작이다, 적어도 움직이는 동안에는. 그러므로 인근 풀턴 스트릿을 달리는 차량소음, 호숫가를 에두른 산책로를 따라 걷는 이들의 속삭임, 호수와 공원에 터잡고 사는 오리며 비둘기며 날것들이 물끄러미 구경하다 문득 날아가면서 일으키는 날개의 퍼덕거림이 적이 거슬린다. 간간이 퐁 사범이 돌아서면 동작이 멈춰진다. 동작이 멈춰지면 소리가 살아난다. 퐁 사범의 구술지도와 시범이다. 율동은 다시 이어진다.
금문공원에서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8시30분부터 11시까지 빌 친 노사와 로스 퐁 사범의 지도아래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계속되는 무료 태극권 수련이다. 정신적 순화 등 내적 수련의 특장을 살려 ‘움직이는 명상(moving meditation 또는 meditation in motion)’으로 불리기도 하는 태극권은 영어로 타이치추안(taichichua)이다. 보통 타이치(taichi)로 줄여 부른다.
중국이 세계에 선사한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되는 태극권은 단순한 무술이 아니다. 중국 상고시대 철학서인 역경(易經)의 태극오행설(太極五行說), 전설적 의학서인 내경(內經), 후대의 노자(老子)철학 등에다 기공술 도인술 호신술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정의된다. 태권도 유도 쿵푸 등 외가권(外家拳)과 달리, 무술로서의 태극권은 내가권(內家拳)으로 정(精) 기(氣) 신(神)의 내적 수련을 중시한다. 기본원리도 힘과 기를 중시하는 외가권과 판이하게 다르다. 도리어 부드러움으로 굳센 것을 이기고(以柔克剛)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하는(煉精化氣)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태극권이 세계에 급속히 퍼져나간 동인은 이런 신비로운 무술측면보다 심신건강 특효 덕분이라고 한다. 여기다 미국의 타이치붐과 관련해, 세계태극권계의 거물이자 세계유일 태극권대학원(서니베일 소재 동서의약대학 부설) 원장인 웡치슈 박사는 1960년대 반전무드가 큰몫을 했다고 말한다. 당시 반전무드 속에서 화평을 중시하는 노장사상이 확산됐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태극권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이후 과학적 실험과 개인적 경험 등을 통해 태극권의 효험이 거듭 입증되면서 태극권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졌다. 세계 태극권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불분명하지만 대략 수억명에 이른다는 추산이다. 태극권의 본고장 중국이 아닌 미국에 본부를 둔 월드 타이치 데이 파운데이션(www.worldtaichiday.org)에 등록된 나라별 지회성격 조직만 해도 65개국에 펼쳐져 있다. 베이지역에도 곳곳에 태극권 도장들이 있다. 쿵푸도장들도 속속 태극권 클래스를 열어가고 있다.
태극권은 심신건강에 어떻게 좋으며 어떻게 익혀야 하는가. 그 효험은 금문공원 야외수련 참가자들의 하나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표정에서 능히 짚혀졌다. 60대 웡치슈 박사와 70대 빌 친 노사의 유쾌한 웃음, 평온한 표정, 유연한 동작도 굳이 따로 물을 필요없는 태극권 미묘법의 증거였다. 지난 10년동안 금문공원 주말수업에 참가했다는 SF 거주 스티브 & 다네사 밀러 부부는 정말 좋은 운동이다.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인터널 오르간(내장)에 특히 좋다고 합창했다.
이번 위크엔드 특별기획 ‘태극권의 세계’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웡치슈 박사 등의 해설과 자료협조로 서서히-그러나 태극권 동작보다는 빠르게- 설명해 나가겠지만, 심신건강 측면의 태극권 원리는 간단하다. 몸과 마음, 정신에서 막힌 것은 뚫고 얽힌 것은 풀어 기혈의 순환이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이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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