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봉투를 열어 거꾸로 들고 미끄러져 나오는 내용물을 그릇에 쏟아 놓았다. 간장과 고추 가루로 절인 깻잎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밑반찬이라고 할까. 나는 젓가락으로 한 장을 떼어 내려고 어설프게 애쓴다. 이 과정은 항상 오래 걸려서 입맛을 더욱 재촉한다. 결국 덩어리 째 떼어지고, 한참만에야 한 장을 떼어 밥 위에 올려놓았다. 완벽하다.
갑자기 왜 깻잎 이야기를 할까? 지난 달 뉴욕타임스에 서울을 여행했던 한 미국인의 귀한 깻잎 발견에 대한 기사가 실렸었다. 맨하탄에 돌아온 그는 이제 한국식당에 갈 때마다 깻잎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깻잎절임은 절임이면서도 아주 신선한 특별한 맛이 있다.
하지만 그 특별한 맛의 진미는, 부엌에 딸린 작은 방에 앉아 창밖 베란다에 놓인 구월 햇빛 가득 받는 화분에서 자라는 깻잎을 보며 먹을 때 더 해 진다. 자신이 먹는 음식이 자라는 자연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인간의 깊은 낙이다. 입으로 깻잎을 씹는 동안 눈으로는 광합성 현상을 목격하는 것이다.
깻잎 화분 옆에는 화분 몇 개가 더 있다. 고추 화분도 있고, 철망으로 세워 놓은 마른 잎 달린 오이 화분도 있다. 가지도 있고 나무 가지로 받쳐 놓은 토마토도 있다. 미국친구들은 놀러 오면 다른 야채는 다 아는 데 깻잎은 알아보지 못하고 “이건 잡초야?”한다.
우리는 시내에서 멀지 않은 좁고 긴 100년이 넘는 집에 사는 도시인이다.
집 뒤에 제법 큰 마당이 있지만, 아내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야채는 안 키우고 꽃만 키운다. 나는 도시에서 야채를 키워 먹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도시 땅은 지난 수백년 세월을 통해 언제 유독성 물질이나 쓰레기들이 버려졌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집이 세워지면서 주택가로 변한 1903년 이전까지 오하이오 농장의 일부로 옥토였다. 하지만 십여 년 전에 이사와 뒷마당에서 다 썩은 침대 매트리스와 차 배터리를 내 손으로 파낸 후론 돌연변이 야채 키울 생각을 아예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집 야채는 화분에서 자란다.
도시에서 신선한 야채를 키운다는 것은 멋진 사치이다. 나는 이따금 다시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서울 아파트 베란다에서 야채 키우는 꿈을 꾼다. 깻잎, 고추, 오이. 서울 아파트는 베란다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아무리 싸고 작은 아파트라도 베란다가 있다. 빨래를 걸고 김치단지도 보관하면서 정리하지 않은 채 대충 쓸 수도 있고, 특이한 꽃들을 키우며 멋지게 장식한 일광욕실로도 쓸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 아파트 앞면과 뒷면의 작은 부분 즉, 앞의 현관과 뒤의 베란다는, 미국인에게 아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당히 멀게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자란 집에도 작은 현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 현관은 단지 문을 열었을 때 미시간의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한 곳이었다. 한국 현관은 신발장도 있고 어김없이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대개의 미국 집 뒷면에도 테라스, 포치 혹은 일광욕실이 있다. 하지만 ‘베란다’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베란다’란 단어는 적어도 내겐 아주 로맨틱하게 들린다.
1899년 노스캐롤라이나 태생인 이모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20세기 초반 경엔 포치를 ‘베란다’라 불렀다. 이 말은 옛 미국 남부에선 일상적으로 쓰여 졌다 한다. 그 ‘베란다’에서 1860년대 남북전쟁 참전용사였던 당신 할아버지의 긴 회상을 들으시곤 했다 한다.
‘베란다’란 말은 원래 인도의 단어이다. 몇 백 년 동안 영어와 유럽어 속에 사용되어 왔지만 아직도 힌디어 사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남부 조상들의 베란다에 대한 얘기를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다. 당시 남부는 독립된 작은 우주와 다름없었다. 그렇게 산 그들이 ‘베란다’라는 인도 건축 용어의 과거 배경역사를 상상이나마 할 수 있었을까? 또한 바삐 돌아가는 아시아 도시의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에 당신들이 쓰던 똑같은 이름의 집 일부가 있는 미래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집 식탁엔 미국 옛 남부와 현대 한국이 공존한다. 특히 오늘 저녁 내 접시위엔 깻잎과 밥 옆에 고추 가루로 양념해서 장시간 조리한 남부 요리도 담겨져 있다.
케빈 커비
북켄터기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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