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가 차단된 맹수의 반격, 그 농축된 광기가 그런 것일까. 그것은 바로 63년 전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의 폭발과 흡사한 잔인성이 재현된 지구 종말의 예고편 아파컬립스의 연출이었다. 아니 그것은 이유 없는 신의 저주를 복수하기 위해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예들에 의한 최후의 반란을 연상케 했다.
2001년 9월11일 오전 아랍계 테러범들이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의 여객기를 납치해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 월스트릿의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패권주의의 상징인 워싱턴의 펜타곤을 자살 특공대가 일본의 가미카제식으로 공습, 여객기 탑승객들과 이들 건물에서 근무하고 있던 수천 명의 무고한 인명이 순식간에 연옥의 화염에 휩싸여 산화한 대참사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전율로 몰아넣었다.
이 피의 화요일 사건으로 인류의 문명이 바벨탑처럼 허무하게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한 인간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실성한 나머지 침몰하는 난파선을 향해 돌진해 오는 파도를 피할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인간은 불사조처럼 무자비한 신의 저주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인류의 강한 생명력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폭력 속에서, 그리고 이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냉전의 대결에서 희생된 수천만의 시체더미를 딛고 일어서서 템페의 계곡을 갈고 문명을 가꿔 왔다.
문제는 이 같은 극단적 테러행위를 유발한 배경과 원인을 규명해야 할 미국이 그 원인을 밝히길 주저하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이 테러에 원인을 제공한 책임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대규모의 잘 훈련된 테러리스트들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고 극단적 테러 방법을 택한 것은 그들로서는 정당하다고 믿는 어떤 절박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3노선의 국가, 민족, 혹은 집단이 세계에 호소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미국은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소위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라는 새 패러다임으로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를 추구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전지구적인 경제적 침탈과 학살을 자행해 왔다. 따라서 9.11 사태는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슬람의 정당한 반란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전면 부인할 수 없다.
국제관계에서의 평화나 충돌의 구도는 전적으로 강대국의 대외정책의 공정성과 함수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슬림의 세계에서 볼 때 미국의 대외정책은 언제나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랍인 대부분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에 접근하는 미국의 정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일부 중동인들은 물론 유럽과 세계 대부분의 민중들 사이에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다.
이것은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재검토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아니 바로 여기에 근본적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는지 모른다. 분노는 테러리스트들이 악용할 수 있는 자산이다.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해결된다고 해서 당장 테러리즘이 완전히 종식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평화를 향한 먼 여정에 첫 발걸음의 시작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접근은 보다 광범위하고 큰 문제의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경제, 예술, 그리고 지적 보고(寶庫)를 가진 미국이 낙후한 정치문화에 의해 질식되고 있는 것이 비극의 근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곡된 정치제도, 여론조사에 의해 조삼모사(朝三暮四)하는 비전 없는 정치, 극도의 정당 이기주의, 대기업의 언론장악 및 소위 전쟁상으로 일컬어지는 군수산업복합체의 금권에 농락당하고 있는 선거 등이 정치가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비극은 또한 역사적 경험이 일천한 가운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일어선 데도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영향력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지구의 오지에까지 전했으나 민주주의의 이상과 시행의 공정성에 큰 괴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17년 전 구소련에서 철의 장막이 무너져 내릴 때 세계의 많은 분쟁지역의 인민들은 그들도 마침내 민주주의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풀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무산되었고 이제 미국은 제3세계 전체가 두려워하는 테러국으로 전락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뿐만 아니다. 이차대전 이후 한반도에서, 그리고 월남과 캄보디아에서,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컬럼비아,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천만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 역사에 대해 책임이 있는 미국은 이 엄청난 인류의 참화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나 배상을 한 적이 없다. 더구나 최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하고 있는 대량학살과 고문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조지 부시 대통령을 국제 전범재판소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세계의 양심적인 인사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을 정도이다.
어쨌든 미국은 뒤늦게나마 9.11 비극을 제3세계를 포함한 전지구적 평화를 모색하는 건설적인 접근의 계기로 삼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엇보다 정의가, 아니 오직 정의만이 대미 테러에 대한 최선의 방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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