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의 장막’과 ‘철의 장막’ 이후 이데올로기는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과 비교될 수 있는 ‘안보 장막’이라는 것이 이곳 미국에 생겨나고 있다.
수많은 외세 침략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 민족과는 달리 9.11 테러 이전까지 한번도 본토가 공격당한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인들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라는 말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선거 기간에 늘 이용되는 단골 메뉴가 되기도 하였다.
9.11 이후 미국은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인권 침해 요소가 있는 법들을 만들었다. 인권의 나라 미국에서 이제 인권은 국가안보라는 대의 앞에 실종된 상태다.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미국인들에게 안보 앞에 인권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이제 국가 안보를 위해 인권이 우선되지 않는 풍토는 결국 미국 내 외국인과 이민자들의 처지를 더 어렵게 하고 있다. 미국은 모든 외국인을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가상의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운전을 하지 않고는 생업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운전면허증 발급을 거부하고, 사소한 신호위반이나 경범죄도 합법 신분 증명을 위해 연행을 하고, 10여 년 전의 볼펜 한 자루를 훔친 죄목으로 합법 이민자를 추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국가 안보라는 방패막 아래 자행되고 있는 일들이며 내용의 깊이를 모르는 많은 미국인들은 정부가 국가 안보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지난 봄, 미국에 입국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체 인식을 위한 열손가락 지문채취법이 제정되었고 이곳 워싱턴 덜레스 공항부터 시범 운영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두 돌이 안 된 손자를 안고 입국하셨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평생을 농사와 목축업으로 사신 영어도 잘 못하는 분들이 아이까지 동반하고 오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입국 심사대에서 트집 잡힐만한 것을 없애기 위해 절대로 음식물이나 농산물은 갖고 오지 마시도록 신신 당부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우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비행기가 도착한지 세 시간 이상이 지났건만 부모님도 두 살짜리 우리 아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시기 전까지 통화를 했기 때문에 도착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유난히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를 비좁은 기내에서 숨죽이고 데리고 오느라 14시간의 비행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거기다 또 몇 시간이 흘렀으니 모두들 얼마나 지쳐있을까 안타까웠다. 한국 승객들이 더 이상 안 나오고 공항은 마중객도 없이 한산해졌다. 결국 항공사 직원을 찾아 어린아이를 동반하고 있는 노부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항공사 직원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아버님의 지문을 채취하는데, 손가락 지문이 인식되지 않아 2차 검색대로 (끌려)가셨고 그곳에서 다른 지시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다. 아버님은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할 지문을 평생의 농사일과 목축일로 잃어버린 것이다.
2차 검색대라는 곳은 별로 기분 좋은 곳은 아니다. 강제적으로 그곳으로 오게 된 사람들은 방문 목적이 불순하거나, 미국 안보에 위협을 줄 수 있거나, 범죄 기록이 있거나 등등의 이유로 곧바로 귀국조치자, 또는 수감 가능 대상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70의 노부부가, 그리고 2살도 안된 아이가 그런 환경에 있다는 것에 화가 났다.
‘안보 장막’은 법 없이도 살아온 노부부도,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에도 적용되는 현실이 된 것이다. 비롯 당신들 나라는 아니지만 아들, 손자 그리고 며느리가 살 나라라며 기도할 때면 빼놓지 않고 미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누가 알아나 줄까 하는 생각에 무척 씁쓸했다. 이제 우리 아버님은 매번 2차 검색대로 끌려가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씁쓸한 일들이 있을런가.
이민 와서 떨어져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한 죄송함과 자식놈 얼굴 한번 보여드리기 힘든 현실의 안타까움과 한편으로는 아버님의 한평생 고생을 깊이 깨달은 날이었다. 오늘 아버지의 지문 없는 손을 보니 쩍 갈라진 살과 깊은 굳은살로 꺼칠하다. 나의 성장을 아버지의 지금의 손이 말해주는 듯하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