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최고권위의 골프잡지인 ‘골프 다이제스트’는 “위도 38도 이하에서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이 여자골프라는 새로운 수출품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는 내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박세리를 시발로 불기 시작한 LPGA의 한국선수 돌풍은 당시 골프 다이제스트 특집기사를 전후해 절정에 달했다. 현재 LPGA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선수는 45명. 지난 주 또 다시 몇 명의 한국선수가 LPGA 출전자격을 획득함으로써 내년에는 50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골퍼들이 LPGA를 휩쓸고 있는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양궁 싹쓸이에서도 확인 되듯 한국 여성들은 대단히 침착하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면서 키운 승부근성이 있다.
LPGA 한국 골퍼들의 놀라운 약진이 계속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사회학과의 신의항 교수는 이들을 다룬 논문까지 썼을 정도이다. 그는 논문에서 한국의 ‘올인 문화’가 한국 선수들이 LPGA를 장악한 원동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번 진로를 결정하고 나면 선수는 물론 부모들까지 물불 안 가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올인 문화가 이런 현상을 가능케 했다는 분석이다. 올인 문화 덕분인지 LPGA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정도로 한국 선수들이 넘쳐나게 됐다.
하지만 부작용 또한 없지 않다. 논란 끝에 일단 철회되기는 했지만 최근 LPGA가 영어사용 의무화 방침을 발표한 것은 한국 선수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여 준다. 선수 숫자나 성적으로 볼 때 한국 선수들이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이런 정서가 이해된다.
한국 선수들이 넘쳐나다 보니 한 대회 건너 꼴로 번갈아 가며 우승을 차지한다. 어떤 대회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한국 낭자들이 독식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하다. 우승이 잦아지면서 이젠 우승 소식이 들려와도 그저 담담하다. “또 우승했나 보군” 하는 정도이다.
1990년대 말 IMF로 한국이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와 전인미답의 LPGA 도전에 나섰던 박세리는 우리 모두를 흥분시키고 감격케 했다. 박세리의 선전에 자랑스러워했고 그녀의 성공이 마치 우리 자신들의 성공인 양 같이 기뻐했다.
특히 1998년 여름 US오픈에서 그녀가 보여준 투혼은 10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여전히 짜릿하기만 하다.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물로 내려 가 신기에 가까운 샷으로 위기를 헤쳐 나오던 모습이 또렷하다. 연장 두 번째 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성공시키며 우승을 확정지었을 때 중계를 지켜보던 모든 한인들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한인들은 박세리의 투혼과 성공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세리의 US오픈 투혼 장면을 배경으로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깨치고 나아가 승리하리라”는 가사의 양희은 노래가 나오는 TV 광고를 보며 코끝이 찡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박세리의 우승과 활약은 우리에게 희망이자 위로였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도전에 나섰던 박찬호가 첫 승을 거뒀을 때 역시 그랬다.
그런데 한국 낭자들의 우승이 너무 흔해지면서 그때와 같은 감격과 흥분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우승 뉴스에도 그냥 무덤덤하다. 사랑의 열정을 느끼게 해 주는 뇌 호르몬도 18개월만 지나면 더 이상 처음의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반복과 일상화로 점차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와 경제 환경의 악화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민 초기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황임에도 눈앞의 작은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웬만한 성취에는 시큰둥해 하기 일쑤이다. 성공의 계단을 밟아오면서 여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사는 일이 심드렁해질 때 필요한 것은 박세리의 첫 우승처럼 짜릿한 감격을 안겨줬던 처음의 작은 성공을 기억하는 일이다. 첫 손님을 맞았을 때, 그리고 첫 거래를 성사시켰을 때의 희열을 말이다. 많은 한인업주들이 첫 매상을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보는 것은 그때의 감격과 초심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이다. 이민 초기의 ‘맨발 투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다시 방망이질 치기 시작할지 모른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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