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효과가 대단하긴 대단하다. 어딜 가나 한국 선수들의 금메달 획득 소식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답답한 골칫거리들은 일단 뒷전이다.
언론들이 누구보다 앞장 서 금메달 소식에 매달린다. 특히 방송 뉴스의 전반은 온통 올림픽 소식, 그중에서 금메달 획득과 국민들의 환호, 그리고 가족들의 스토리를 전하는데 할애된다. 금메달이 일시적으로 안겨주는 국민적 자긍심과 현안 가리기 효과 때문인지 대통령의 지지율이 금메달 1개에 1%포인트씩 오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실제로도 꼭 그만큼 올랐다.
중계방송도 금메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카메라가 이곳저곳으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한창 중계를 하다 금메달을 딸 것 같은 경기가 벌어지면 화면이 그쪽으로 바뀌었다가 한국선수가 아쉽게도 은메달에 머물면 별다른 멘트도 없이 곧바로 다른 경기장으로 카메라가 돌아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금메달 지상주의가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너무 당연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가 한국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면서 오랜 숙원과 갈증을 풀어준 이후 한국은 이제 올림픽에서 매번 10개 내외의 금메달을 딸 정도로 성장했다. 금메달이 이처럼 흔해졌음에도 금메달에만 지나치게 환호작약하는 풍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금메달을 놓친 선수들이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런 박탈감은 금메달이 걸린 경기에서 패한 후 좌절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은메달을 딴 한국선수들이 시상대에 올라 눈물을 훔치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것은 기쁨이 아니라 통한의 눈물이다.
승부를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의 인식편차를 가장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올림픽 순위 집계방식이다. 미국은 금메달과 은메달, 그리고 동메달에 차이를 두지 않고 전체 메달을 합해 순위를 매기는 ‘메달 합계’ 방식을 쓴다. 반면 한국식 방식은 금메달을 우선시하는 ‘메달 가치’ 방식이다. 은메달, 동메달은 순위 산정에 부차적일 뿐이다.
19일 현재 베이징 올림픽 국가순위를 ‘메달 합계’ 방식으로 보면 미국이 1위, 중국은 2위, 그리고 한국은 8위이다. 하지만 ‘메달 가치’ 방식으로 매기면 중국이 단연 1위이고 미국은 2위, 한국은 7위로 한 계단 더 올라간다.
메달이 국민들에게 안겨주는 자부심의 크기는 분명 색깔 순이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복감도 색깔 순일까. 대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이다. 당연히 금메달이 안겨주는 짜릿함은 강렬하다. 하지만 너무 강렬해서인지 오히려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마치 거액복권 당첨의 감격과 짜릿함이 오래 가지 않듯이 말이다.
선수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동메달리스트들의 행복감이 가장 오래 잔잔하게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은메달리스트들과 비교했을 때 뚜렷하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메달색이 결정되는 순간 선수들의 행복지수를 조사해 보니 동메달을 받은 선수들은 10점 만점에 7.1이었던데 비해 은메달리스트들은 4.8에 불과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은메달리스트들은 가질 뻔하다가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에 흔히 사로잡힌다. 그러나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놓칠 뻔하다가 가질 수 있게 된 것에 포커스를 맞춘다. 몇 점 차이로 아쉽게 수석을 놓친 학생과, 떨어진 줄 알았다가 등록 안한 합격자가 생기는 바람에 추가 합격된 학생 중 누구의 기쁨이 더 클까를 생각해 보면 이유가 쉽게 이해된다.
베이징 올림픽 남자 탁구 단체전에서 한국이 오스트리아를 꺾고 동메달을 차지한 후 한국의 간판스타 유승민은 “은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이는 선수들이 많은데 동메달이 이렇게 기분 좋은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탁구계 내분 등 온갖 악재를 이겨내고 얻어낸 동메달은 선수들에게 금 못지않은 행복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지난 주말 장미란 선수는 역도에서 한국에 자랑스런 금메달을 선사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당당히 선 그녀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 이유는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그녀가 보였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깝게 은메달에 머물렀던 장 선수의 표정에서는 은메달리스트들이 흔히 보이는 아쉬움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한 후 결과에 만족해하는 장 선수의 밝은 표정에서는 체격만큼의 넉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살벌한 논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위기감과 열패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1등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법. 최선을 다한 결과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소중한 것이 아닐까.
메달이 안겨주는 행복감의 크기는 색깔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동메달 행복론’이다. 놓쳐버린 것이 아니라 가지게 된 것에 집중할 때 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은 경기장 밖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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