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각 대학들은 일제에 얽매였던 굴레를 벗어버리고 발 빠르게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게 된다. 경성제국대학은 서울대학으로, 한때 경성여자전문이라고 교명을 바꿀 것을 강요당했던 이화전문은 이화여자대학으로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미술과를 신설하기로 신청을 했는데 문교부에서 미술과는 시기상조라고 반대를 했다던가. 그러나 김활란 박사는 해박한 지식으로 설득을 하고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미술과가 탄생하였고 초대과장은 심형구 선생이었다. 다음해인 1946년에는 서울대학에도 미술과가 생기고 초대과장은 장발 선생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해방 후 제일 처음 있었던 개인전은 동화백화점(신세계) 3층 전시실에서 열렸던 ‘윤봉숙 자수전’이다. 동경여자미술학교 자수과 출신으로, 이대 자수과를 맡고 계시던 장선희 선생의 미술학교 후배였다. 일제시대에 개인전을 연 분이 몇 명 된다고 들었으나 해방된 조국에서 화화가 아닌 자수로 20대의 신인이 당당히 선봉장이 된 셈이니 그 의욕이 놀랍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운 크고 작은 아름다운 작품들이 단번에 시야에 튀어 들어와 나의 혼을 사로잡는다. “야- 이럴수가!” 자수로 이렇게 훌륭한 효과를 낼 수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자수라 하면 어머니가 베갯모에 수를 놓던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던 시골뜨기 초보 미술학도였으니 대경실색했던 것은 당연하였고 후에 알고 보니 수본을 그린 사람은 중견 동양화가였다 하니 작품들이 품위가 있고 짜임새가 있었던 것 같다. 수본부터 본인이 그리고 직접 수를 놓은 줄 알았던 내가 자수에 대해 너무 몰랐던 옛날이야기이다. 지금은 어떻게들 하는지 아직도 남의 분야라 잘 모르겠다.
윤봉숙씨는 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얼마 후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는데 아까운 사람이 빨리 갔다고 선배들이 아쉬워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다음에 같은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던 ‘김세용 양화 개인전’도 많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이 좋다”고 하는 평과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동시에 듣고 있는 듯 했으나 전시회로서는 성공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키가 장대 같은 미남 청년이 한쪽 발에 조리(일본 짚신)를 신고 다른 쪽 발에는 검정 고무신을 끼고 성큼성큼 전시장을 활보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기가 막혀 우리 일행은 서로 쿡쿡 찌르며 웃음을 참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작가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티스에다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옮겨 놓은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조용히 앉아서 듣고 있었는데 그 시대로서는 꽤 앞서 가는 분이었다.
언젠가 한경직 목사님이 김세용이란 화가를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아주 가까운 분의 아들인데 어릴 때 재주 있는 애라고 소문이 나있었는데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된다”고 하셔서 나는 학생 때 그 분의 제1회 개인전에 가서 뵈었을 뿐 대화도 해본 일이 없고 소식을 알 수 없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김세용씨는 만사를 잊고 작품만을 위해 산 화가라고 믿어지는 게, 언젠가 백몇십번째 개인전을 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전히 짝짝이 신을 걸치고 다닌다던가… 아마 이제는 안정된 노화백으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1948년이었던가? 광주의 여고 미술교사가 동양화를 들고 왔는데 작품이 좋으니 가보라고 해서 우리는 우루루 동화 화랑으로 몰려갔었다. 그 분은 동경여자미술학교 일본화과 출신으로 이미 우리와 알고 지내던 박래현씨(운보 김기창씨 부인)의 미술학교 후배인 천경자씨였다. 아주 소박하고 겸손한 분이었는데 뱀과 구렁이 등 징그러운 소재가 많아 아직 미숙한 미술학도였던 우리는 왜 여류화가가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깊은 곳까지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천경자씨의 제1회 개인전도 아주 성황리에 끝이 났다.
좋은 개인전을 보며 우리도 졸업을 하면 개인전을 가질 수 있는 화가가 될 줄로 착각을 했었는데 평생 한번도 개인전을 못하고들 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자신에게 다짐하였다. “나는 끝까지 간다!”하고.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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