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 A’s의 불펜투수 브랫 지글러에게는 올해 초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선다는 기약이 없었다. 1979년 10월생인 그는 서른이 다 되도록 휑한 마이너리그 구장에서 기약없이 던지고 또 던졌다.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과 부진으로 A’s 불펜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지글러에겐 희망등이 켜졌다. 전반기가 한창인 5월31일에야 난생처음 메이저 마운드에 섰다.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원정경기에서였다.
기록만 보면 그의 첫 경험은 그저 그랬다. 8회말 2사 주자3루 상황에서 가우딘의 뒤를 이어 등판한 그는 첫 타자 킨슬러에게 중전안타를 맞았다. 3루주자 홈인, 가우딘의 자책점이 됐다. 1루주자 킨슬러는 견제구로 아웃. 8회말은 끝났다. 지글러의 메이저 첫 경험도 공 5개를 던지며 안타 1개를 맞은 뒤 아웃카운트 1개를 잡고 끝났다.
몸무게(195파운드)가 200파운드 가까운데도 키(6피트4인치)가 워낙 커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늦깎이 메이저리거 지글러는 이후 조금씩 바빠졌다. 글러브 낀 손과 공 쥔 손을 오른쪽 허리춤 아래서 모았다가 몸을 잔뜩 비틀고 더욱 낮춰서 던지는 꽈배기폼 사이드암/언더핸드 피칭도 조금씩 위력을 더해갔다. 선발도 아니고 마무리도 아닌 틈새피칭이 주임무였지만 나갔다 하면 점수를 내주는 일이 없이 돌아오곤 했다. 처음에는 특이한 피칭 스타일에 타자들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려니 했다.
그러나 무실점 피칭은 계속됐다. 어어 하는 사이에 15이닝 넘고 20이닝 넘더니 지난달에는 1907년 이후 101년동안 유지됐던 ‘데뷔전부터 무실점피칭 최다이닝’ 기록을 깼다. 기껏해야 중간에 한 이닝을 맡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고작 한 타자만 상대하고 물러서는 틈새투수인 까닭에 야구기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지글러의 이름은 서서히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팀내 비중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마무리전문 휴스턴 스트릿이 1점차 세이브 기회에 출격했다 거듭 실패하면서 지글러가 사실상 마무리로 기용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무실점 피칭은 변함이 없었다. 13일 현재 38이닝 무실점. 데뷔전부터 계산하면 의미있는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퀘퀘묵은 19세기말 기록까지 뒤져야 할 정도로 경이적 피칭이었다. 기록작성이 비교적 현대화된 이후의 것만 해도, 게다가 데뷔전부터라는 단서를 단서를 빼고도, 불펜투수로는 1949년 클리블랜드의 알 벤턴 이후 59년만의 나온 최다이닝 연속무실점 행진이었다.
14일 오후 지글러의 대기록이 한 이닝 늘어난 뒤 곧 깨졌다.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다. 4대4 동점인 가운데 8회말 등판한 지글러는 첫 타자 루지아노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나바로는 중견수 플라이로, 발델리는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메이저리그 초유의 ‘데뷔전부터 최다이닝 연속무실점’ 피칭은 39이닝으로 늘어났다. 9회초 출격에서 사단이 일어났다. 첫 타자 조브리스트를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다음 타자 이와무라에게 우전안타를 허용하더니 뒤이은 업톤에게 좌익수쪽 깊숙한 2루타를 맞아 1점을 허용했다.
경이적 기록행진에 마침표가 찍혔다. 전세는 4대5로 뒤집어졌다. 지글러는 다음타자 페냐를 고의볼넷으로 내보낸 뒤 플로이드를 병살타로 처리하며 메이저 마운드에서의 첫 실점을 안고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패배는 면했다. A’s 타선이 곧바로 9회말 1점을 만회, 동점이 되고 경기가 연장전에 들어갔다. 대기록이 깨진 지글러의 심정은 어땠을까. (업톤에게 적시 2루타를 맞은 뒤) 다시 마운드로 걸어갈 때에야 그 기록생각이 났다. 그렇지만 (그 안타를 맞는 순간) 내 머릿속에 탁 튀어오른 생각은 ‘어이쿠, 1루에 주자가 있는데 어떻하나’ 이 생각뿐이었다. A’s의 밥 게런 감독은 지글러가 그동안 해온 일을 칭찬하며 위로했다. 거의 노히터 타입 같은 기록행진이었다. 그는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했다.
한편 A’s는 이날 연장 12회초 카를로스 페냐의 결승홈런으로 2점을 내주고 12회말 1점을 만회하는 데 그쳐 6대7로 패했다. A’s는 이로써 55승65패, 레이스는 73승47패가 됐다. 레이스가 패배보다 승리가 26게임이나 많은 것은 팀창단 이래 처음이다. A’s가 3, 4연전 시리즈에서 9차례 연속적자(3연전의 경우 3연패 또는 1승2패)를 본 것은 1979년 이후 처음이다. 올해 후반기에는 4승21패를 기록중이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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